<예프게니 오네긴>과 도스토옙스키
2014-11-01 13:49 l 교회연합기자 epnnews@empal.com

<예프게니 오네긴>과 도스토옙스키  



어떤 이가 선정한 필독서 100권에 푸시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을 뽑아준  것은 반가운 일. 그러나 운문소설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이라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버전으로 감상해보면 어떨까 싶다. ‘꿩 대신 닭’을 넘어 “꿩 먹고 알 먹고‘를 즐기게 될 수도 있으리라.    
줄거리: 도시생활에 지친 예프게니 오네긴이 시골로 와서 친해진 브라지밀 렌스키가 약혼녀 올리가의 가족을 소개해주는 자리에서, 올리가의 언니 타치야나는 오네긴에게 반해버린다. 그러나 편지로 전하는 그녀의 마음을 오네긴은 매몰차게 물리친다.   
사소한 일로 벌어진 오네긴과 브라지밀의 결투에서 브라지밀이 숨지자 오네긴은 유랑 길을 떠난다. 세월이 지나 러시아의 사교계로 돌아온 오네긴은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한 타치야나를 보게 되자 이번에는 오네긴이 타치야나에게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쓰고 퇴짜를 맞는다.
타치야나는 장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안달이 난 오네긴은 직접 그녀를 찾아가 간절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의 품으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지만 끝내 거절당한다. 타치야나도 속으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정조를 깨트릴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랑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두고는  당시 러시아의 진보적 지식인층은 불만이었다. 타치야나로 하여금 한 걸은 더 나아가게 하지 못한 푸시킨을 진부하다고 나무랐다.     
푸슈킨(1799~1837)의 애독자였던 도스토옙스키(1821-1881)도 <예프게니 오네긴(1830)>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작가의 일기>에서 <예프게니 오네긴>은 오히려 <타치야나 라리나>로 제목을 붙여야만 했다면서, 오네긴처럼 매사에 교양과 지성을 앞세워 사물을 복잡하게만 보려드는 인간형 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시골 처녀 타치야나와 같은 인품이 진정한 의미로 성숙한 인간이라 보는 푸시킨의 통찰력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오네긴은 똑똑하지만 성실하기도 한 신사, 그러나 자신이 지닌 교양과 지식을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즐겨 입에 올리던 ‘세계적 고통의 수난자’가 되고자 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세계적 고통의 수난자’로 자임하고 있는 오네긴 따위의 소위 지성인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속물근성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내세우는 당시 러시아의 비평가들은 타치야나는 대담하게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버리고 사랑하는 오네긴의 품으로 달려갔어야만 했고,   작품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못한 푸시킨을 진부하다며 나무란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타치야나와 그녀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여인들은 모두 용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많은 비평가들이 논하고 있는 것처럼 연애와 도덕 사이의 상극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녀는 정조라는 낡은 도덕관을 들고 나서긴 했고, 그것을 믿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는 것.   
당시의 비평가들이 말하려 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 깊은 곳에서는 그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어떤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교만이 썩어빠진 상류사회의 삶을 통해서 기품으로 발전하여 그럴듯하게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천박한 생각이야 말로 푸시킨의 사상을 오해하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녀가 귀족사회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오염되거나 변한 것이 아니라, 오네긴이 그녀에게 준 불행이 그녀로 하여금 의연한 인간으로 다듬어지게 한 것이라 했다. 그녀는 오네긴에게서 당시 러시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툴고 단순하기만한 지성인의 패러디를 간파해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감 있고 의연한 여인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치야나가 장군의 부인이 아니라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오네긴을 따라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도스토옙스키는 분석한다. 다치야나는 오네긴과 같은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에는 오네긴을 경멸하려는 뜻보다는 슬픔이 있을 뿐이었다. 푸시킨은 그런 타치야나를 그린 것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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