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
2015-02-28 11:10 l 교회연합기자 epnnews@empal.com

이상범목사


<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

16세기 네덜란드의 문학자 콘스탄틴 호이헨스(Huygens,1596-1687)가 그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의 <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1629)를 두고 “유럽 회화사에서 가장 강열한 작품”이라 평했다는 사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깔려있다.
호이헨스는 그 그림에서 “파리한 유다의 표정에서는 눈곱만치도 희망을 찾아 볼 수 없다”했다. 그 이전까지, 가톨릭이 요구하는 유다는 노란 옷을 입은  배신자이거나 아예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유다는 결코 회개할 수 없는 악마여야만 했다. <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는 그 유다를 절망할 줄 도 알고 회개도 하는 인간으로 복권시킨 쾌거가 되는 것이다.
처음교회 당시, 로마에 그리스도인이 불어나면서, <사도신경>에서 들어나고 있는 대로, 로마인 빌라도에게 예수처형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 껄끄러웠던 로마교회가 그 탓을 유다와 그의 동족인 유대인에게로 돌리려 했던 속내를 폭로하는 장거이기도 했다. 
<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는 “넷”상에서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화면, 유다가 오른편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있다. 밝은 조명 아래 의기양양해하는 제사장들과는 대조적이다. 유다의 무릎 언저리에서 렘브란트가 그렸다가 지워버렸다는 돈주머니의 흔적까지를 볼 수 있다면 더 할 나위없겠으나, 복사판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서는 약간의 조명을 받고 있는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는 은돈과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유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의 눈길은 제사장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더러운 돈’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죄와 뉘우침은 오로지 그 은돈에 투영되어 있다. 움켜잡은 두 손, 빈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과 헝클어진 머리칼은 “눈곱만치도 희망은 찾아 볼 수 없다”던 호이헨스의 말을 실감케 한다. “은돈 30냥”을 되돌려 주기까지 고뇌하며 몸부림쳤던 인간 유다의 실존을 볼 수 있게 하기에. 
비슷한 풍조는 문학작품에서도 움텄다. “내가 유일한 유다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스도 사후, 나보다 훨씬 지독한 ‘유다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지 다들 알고 있지 않는가! 작자들은 그리스도를 팔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기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Francisco G?mez de Quevedo,1580-1645)가 <꿈(1627)>이란 작품에서, 지옥에 있는 유다로 하여금 거침없이 내뱉게 한 대사이다. 마구잡이로 성직을 팔고 사는 당시의 로마교회를 꼬집은 것이다.
유럽에서 그와 같은 예술작품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개혁의 물결 때문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방적으로 그리고 막무가내로 몰아붙여왔던 유다에를 향한 증오의 물결이 어느 정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 그런 상황 앞에 옹색해질 수밖에 없었던 로마교회의 배경에는 르네상스 후기에 가톨릭교회에서 만연하고 있었던 “시모니(성직매매)”라는 어두운 그늘이 약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지를 차지하게 된 로마교회는 천국과 세속권력을 아울러 장악하게 된 터라, 고위성직자들은 특권을 누리는 귀족계급이 되어있었다. 표면상으로는 성직이 독신제였지만 이탈리아 영방국가 지배자들은 다투어 피붙이들을 로마로 보내어 “패밀리”의 특권을 고정화하기에 급급했다.   
가톨릭교회가 세속국가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던 “영적구원”이나 “속죄”와 엉킨 특권들이 이익을 제공하는 상품이 되어주었다. 고대나 중세에서 천재와 기근, 역병과 전쟁이 가져다주는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기기 위해 빌어야 했고, 치료를 위해서도 빌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영혼이 발붙일 수 있는 터전을 위해서도 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래저래 “속죄권 시장”은 번영을 누리기에 알맞은 상황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약간의 비약이 허용된다면 칼 발트를 인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유다는 예수를 제외한다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 중에서 유다만이 하나님의 의지와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본질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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