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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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신천 출신
홍택기(洪澤麒 1893.5.11~1950)목사는 1893년 5월 11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고향의 유영제(流英齊)에서 한문사숙을 하였고, 선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여 고등과를 졸업했다. 후에 선교사가 세운 신성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2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1908년 8월 기독교에 입신하여 1910년 7월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에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3월 처음으로 교역자의 길인 전도사로 임명 받았다. 1924년 12월 19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김병희, 박승명, 박연세, 방경모, 소병권 등과 함께 제18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2년부터 1943년까지 평북노회 경내에 있는 차련관(車輦館)교회(1905.1. 30 설립)를 담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평북노회 서기를 지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평북노회장을 지냈다.
그의 본격적인 교정경력(敎政經歷)을 보면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서기(書記)를 시작으로, 1937년에는 교단 부총회장을, 이듬해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이 총회가 바로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지울 수 없는 오욕을 남긴 총회이다. 1938년에 모인 총회라고 해서 소위 ‘38총회’인데, 천추의 한을 남긴 신사참배로 교단적으로 공식 결의한 총회가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땅을 치며 가슴을 쥐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 당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사실 불가항력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총회가 개회도 되기 전 일본 경찰당국은 평양에서 모이는 전국의 총대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고, 개회 당일에는 총대 바로 옆에 일본 형사들이 끼어앉아 총회장이 가결여부를 물었을 때 형사들이 총대들의 팔을 잡고 손을 들게 하였다.
‘38총회’로 이름난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구성을 보면, 목사 86명, 장로 85명(1명 미참), 선교사 22명으로 총합계 193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설교를 맡은 이문주 목사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삼고 “신앙의 3대 요소”(믿음 소망 사랑)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가 투표를 하니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회장에 김길창 목사, 서기에 곽진근 목사가 당선되었다.
그 다음 날 9월 10일 오전 9시에 속회가 되었다. 박웅률 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 이어서 당시 평남지사(平南知事)인 이시다(石田)가 나와 축사한 후 임원 교체식이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 40분에 공천부장 한태영 목사의 보고를 받은 후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웅률 목사가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채택안을 채용하기로 제안하였다.
사회를 맡아보던 홍택기 총회장은 가(可) 부(否)를 묻기 전에 반대측에게도 발언권을 주어야 하는데 토론없이 즉석에서 성명서 내용을 가결시키고 말았다. 회의 원칙상 가(可)하면 ‘예’ 하시고, 부(否)하면 ‘아니요’라고 하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가만 묻고 부는 묻지도 않고 이 안건은 만장일치라는 누명을 씌운채 총회를 통과, 즉석에서 홍택기 총회장은 가결선포를 하고 다음과 같이 단상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총회의 성명서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連反하지 않는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에 神社參拜를 率先斷行하고 追히 國民精神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時局下에서 銃後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期함. 昭和13年9月10日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長 洪澤麒

이렇게 총회장이 선두에 서서 신사참배 안건을 결의 선포하고, 서기가 이를 받아 대독하자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선교사회원들은 총퇴장하고 그 중 해밀톤(F.E.Hamilton 咸日頓) 선교사가 일어나 홍택기 총회장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법(不法)이요 라고 힘차게 외쳤지만 그를 경호하고 있던 경찰들의 제지로 아무런 효과를 얻지도 못하고 말았다.

총회 임원진과 각 노회장단, 즉시 평양신사 찾아 참배
이렇게 혼란의 와중에서 신사참배 안건이  결의 통과 선포가 되자, 부회장 김길창(金吉昌) 목사는 임원회를 대표하고, 각 노회장들은 노회원들을 대표하여 즉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찾아 참배함으로 조선장로교회의 신앙의 등불은 이렇게 꺼지고 말았다. 이 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을 조선총독과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리대신, 척무대신들에게 전보(電報)로 총회장 명의로 발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게 되었다는 오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의 상징인 신사(神社)에 한국교회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끓게되는 비참함이 두고두고 한국교회사에 회자화 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회장 김길창 목사(경남노회)는 평양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로 낙인찍혀 총회장에 여러 번 출마하였으나 그때마다 낙선되어 결국엔 총회장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역사가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이 신사참배 결의로 말미암아 4개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敎)는 즉시 폐교되었고, 선교사들은 신사를 참배하는 조선교회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야 말았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폐교
이뿐만 아니라 총회는 계속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국방 헌금을 했고, 전투기 2대를 구입해 바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감리교의 양주삼(梁柱三), 장로회총회 부총회장 김길창, 성결교회의 이명직(李明稙) 목사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신궁(伊勢神宮),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등을 직접 찾아가 참배하고 돌아왔다.
홍택기 목사는 1939년 9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평의원을 맡았고, 1940년 2월엔 국민정신총동원 평북노회지맹(支盟)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 1944년 8월엔 징병제 실시 기념강연회 연사로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했다.
홍택기 목사는 이렇게 철저하게 변질된 모습으로 총회를 친일적으로 이끌어 갔고, 5도 16개 노회 연합의 주최로 퇴수회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
이때 총회가 신사참배하고 난 후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감옥에 갔다 나온 이기선 목사의 간증설교는 참석한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
해방 후(1945.8.15) 북한교회 수습방안이 대두되자 당시 만주 봉천에 있던 만주신학교 교수로 재직한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수습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홍택기 목사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은 조선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했다는 변명을 하였다. 애석한 일이지만 광복 직후 신사참배 문제로 예장고신 교단이 분리되어 나가게 된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 교역자들에게 자숙 요구
옥중에서 출옥한 고난받은 성도들은 교회 정화의 논리로 일제하 신사참배 했던 교역자들과 신자들의 자숙을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신사참배에 동조한 자들은 일제치하의 감옥생활에 버금가는 고난 속에서 신사참배를 해 가면서 교회를 지켰다고 주장하며, 서로의 입장만 내 세우다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된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복음의 본질을 무시하고, 이해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덕을 피차 세우지 못하고, 상대를 용납하지 못한 결과로 분열하고 만 것이다.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 고난을 겪은 성도들이나, 또 당신네들은 감옥에 가서 고난을 겪었다지만 우리는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 부지해가기 위하여 감옥밖에서 그대들이 겪은 고난에 버금가는 수모와 역경을 지탱해 내었다고 하는 아집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분열되고 형제가 원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8.15광복 이후 홍택기 목사는 평안북도 월곡교회(月谷敎會)를 거쳐 철산군 점면 신곡동교회(1914.3.15 설립)를 담임하던 중 1950년 6.25전쟁시에 행방불명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한 교계인사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로당(南勞黨)으로부터 숙청된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어 그가 언제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의 한 장면인 것 같아 씁쓰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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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27회 총회장 홍택기(洪澤麒)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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