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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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 필자는 오랜만에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문인협회와 미국의 워싱턴문인회가 공동으로 한인문학 심포지엄을 열기로 협약 중이었는데, 필자는 그곳에서 “미국 동부 한인소설가들의 작품세계"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현장에서 나는 그곳의 대표적인 동포 작가로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라이프>, <생존자>… 등의 작품으로 이름난 한국계 미국 소설가, 그곳의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추천되곤 하는 이창래의 작품세계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음이 기뻤다. 특히 그의 <제스처 라이프>, 달리 <척하는 삶>이란 이름으로도 번역된 그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던 것도 의의가 큰 일로 생각하였다. 그 소설은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방면의 매우 비중 있는 작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여행사 가이드의 인도 하에 관람했던 두 작고 미국 문인들의 문학 기념관과 그 해당 작가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붓을 들게 된 본뜻이다. 그 두 미국 작가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와 마크 트웨인(1835~1910)이다. 전자는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등으로 이름난 작가이며, 후자는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으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우리 일행은 앨런 포의 생존(거주) 기념 가택과, 마크 트웨인을 기념해 건립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최대도시 볼티모어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거주 가택은 사영(私營) 기념관 형식으로 남아 있는 처지였지만, 코네티컷 주의 주도(州都) 하트퍼드 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은 공영(公營) 건물로서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며 거주했던 고전적인 저택 바로 옆에 별도로 건립돼 있어서 그 웅장한 모습이 매우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는 에드거 앨런 포와 마크 트웨인 두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이다. 포는 한마디로 고난의 작가였다. 그는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부모로부터 태어나, 그나마 그 부모 모두 일찍 사망해 그는 그 후 고아 신세로 살아가야만 했다. 어느 부유한 집에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고집스런 그의 성격 때문에 양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후에 웨스트포인트 육사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는 별수 없이 그의 재능인 글쓰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잡지사의 기자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인, 소설가, 평론가였던 다재다능했던 그의 필치가 너무도 날카로워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의 권고사직 형식으로 거기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설상가상이란 말처럼 그는 그의 사망 2년 전에 불행하게도 상처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 뒤 그가 새 여인과의 결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숙모 집에 가던 중 볼티모어의 한 노상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의식불명 환자로 발견되었고 아깝게도 그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그의 불행한 삶을 업튼 싱클레어는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다.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방황하였고, 적이거나 벗이거나 간에 서로 다투었으며, 알코올과 아편에 중독되어 온갖 형태의 핑계와 부정직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런 불행한 삶과는 별도로 그의 작품들만은 오늘도 살아서 반짝이고 있음이 대조된다.

  마크 트웨인은 무한운동기계를 발명해 보려고 애쓴 몽상가 풍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인쇄공이 되었고, 그 후에는 미시시피 강의 물길 안내원이 되었다가, 남북전쟁 이후에는 네바다로 가서 금광의 갱부 생활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앨런 포가 그러했듯이 트웨인도 언론 기자로 생활하면서 글을 쓰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쓴 작품으로 제법 돈도 벌게 되었고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그러나 그의 생활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속물근성을 지닌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기득권 옹호의 세력들과 싸우는 일이 그가 문학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가를 결정할 판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성공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상당 기간 제왕처럼 살았다. 그러나 후년에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선친의 그 발명에 대한 몽상과 그의 청소년기의 인쇄공 경험 등이 합쳐져 발명에의 꿈이 발동되었던 것일까. 그는 식자 기계, 곧 인쇄기 발명 작업에 몰두하면서 결국 많은 빚을 지게 되어 파산에 이르고야 말았다. 아내도 딸도 다 죽거나 떠나고 그 역시 몰락한 상태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만은 그런 그의 불행과 무관하게 오늘도 그대로 살아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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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시련의 두 미국 작가-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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