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이글은 한국공공정책개발원이 지난 7월 4일 생명나무숲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공공실천포럼 창립기념 세미나’에서 장헌일 목사(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 원장)가 강연한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공공신학과 공공정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1.jpg
 한국교회 불신의 근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 부도덕성을 큰 하나의 근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성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과 교회 홍보를 위한 보여주기식 봉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사회봉사와 진정한 사랑을 담은 구제가 신뢰회복의 근거와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척도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에 따른 삶의 태도와 실천이 중요한 변수로서 신뢰도에 있어 한국 교회가 가장 불신을 받는 것은 무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 가운데서도 믿음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이 기독교 공동체의 우선적 배려나 편의 그리고 이익을 비롯 신학적 전통의 보장 등을 위한 실천이 아니라 교회의 공교회성과 공공성에 입각한 공공선(common good)을 추구하려는 실천적 사명이 되어야 그 본래적 의미를 살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공공신학에 의한 공공신앙은 크게 신앙생활의 공적 영역의 문제와 교회의 공적 성격으로 구분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와 방법을 통해 시민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단지 선언이나 담론 형성 자체로 그쳐서는 안 되며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관계함으로써 공공선에 기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공공신학에서 신학의 공공성(publicity)을 증언하는 일이다.
공공신학은 시민사회와 협력하며 정책 입안에도 기여한다. 영국 상원은 성공회 주교를 참여시켜 약자의 권리를 반영토록 한다. 아프리카 극빈국 부채 탕감 캠페인 ‘빈곤을 역사 속으로(make poverty history)’는 교회가 처음 주도했다.
공공신학이 적용 가능한 6가지 카테고리로, 국가, 시장, 미디어, 시민사회, 학계, 종교계를 꼽았다. 한국의 경우 국가와 시장, 미디어 등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있으며 교회는 이들 영역 속에서 공공의 선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공공신학자, 스택하우스(Max Stachhuose)는 이 공공신학을 넓은 의미로서 정의한다. 그는 신학이 ‘공적’(public)이라고 불릴 수 있는 두 가지의 근거에 대해서 말한다. “첫째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우리는 비밀스런 집단이 아니며, 어떤 특권층도 아니고,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한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는 힌두교도 및 불교도들과, 유대교인 및 회교도들과, 인문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합리적인 입장에서 논의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신학은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으로 인도될 것이다. 공공신학은 본성적으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공공신학의 자료 또는 근거(warrant)가 성경, 전승,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라고 하였으며,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창조, 해방, 소명, 언약, 도덕법, 죄, 자유, 교회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주제(theme)들을 다루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의 공공신학자 중의 한 명인 몰트만(J. Moltmann)은, 공공신학(theologiapublica)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의 공적 세계 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관심과 희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공신학은 사회의 공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의 공적 상관성을 강조한다.(노영상, 한국기독교윤리학회 학술대회, 2008)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과 이를 회복케 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회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교회와 회중의 정체성을 통한 대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와 세상과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을 통한  교회의 공교회성의 역할과 다각도의 사회 변혁의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공공신학에 의한 공공신앙은 크게 신앙생활의 공적 영역의 문제와 교회의 공적 성격으로 구분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와 방법을 통해 시민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은 단지 선언이나 담론 형성 자체로 그쳐서는 안되며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관계함으로써 공공선에 기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공공신학에서 신학의 공공성을 증언하는 일이다.
신학 안에 명시적 공공성을 완벽하게 장착하는 것만이 신학자의 과제는 아니다. 그 신학이  교회 안에서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신학자의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는 명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실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의 실제적 공공성을 고양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스택하우스가 언급한 ‘에토스’에 관심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스택하우스는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에토스(ethos)를 형성하여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에토스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추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교회 갱신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공공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작동되는 에토스를 교회에 새롭게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참된 갱신은, 교회의 에토스가 갱신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김병권,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2014년 11월 22일)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공공신학은 크게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과 독일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의 공공신학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중에서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이 한국에서는 주로 논의되고 있다. 어느 쪽 공공신학을 논의하든, 그 출발점은 대체로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대안 모색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평가의 기저(基底)는 긍정적이다. 공공신학이 교회 및 크리스천의 개인주의적 퇴행 성향에 제동을 걸고 공공성 회복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살펴보면, 그의 신학은 교회 및 신앙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지구촌의 세계화 현상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야말로 그 잠재적인 역량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제기하는 쟁점들을 다룰 수 있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의미하는 ‘세계화’는 ‘특정 콘텍스트 초월’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특정 콘텍스트를 포괄하고 상대화시키는 보다 광범위한 공중(public)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고 한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스택하우스는 유럽의 ‘정치신학’과 자신의 ‘공공신학’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는 “정치신학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정부를 사회의 포괄적인 제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특정 콘텍스트 초월’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은총 개념의 토대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이 이러한 행태의 공공신학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레슬리 뉴비긴 등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기독신앙의 공공성에 대하여 더욱 근본적인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많은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삶 속에서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고백이 하나님의 사역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전한 교리는 윤리를 동반하는 것이다. 말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이 때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느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의 사회를 향한 도전과 응답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공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대한 논의들은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나름대로의 공공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모호성과 다양한 의견의 존재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비판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비록 신학적 견해에는 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상황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논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흠 없는 공공신학,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공공신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이다.
이러한 한계에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계신 주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의 지속적인 증인이 되려는 자세와 태도, 즉 영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향한 끊임없는 복종과 섬김의 삶을 모색하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공공신학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학술/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공공신학과 공공정책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