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박명수 교수가 발제한 원고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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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와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가 시작된 것인 제주도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빚어진 신축교란의 광풍이 지나간 20세기 초였다. 당시 제주도 출신으로서 육지로 나가있던 사람들 가운데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돌아와서 기독교신앙을 유지했다. 특히 제주출신 조봉호는 애비슨의 세브란스에서 치료를 받고, 신자가 되어 다시 제주도에 돌아왔으며, 또 다른 제주출신 조봉호는 서울에서 경신학교와 평양에서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와 잡했다(박정환 195). 장로교 독로회는 이들을 근거로 해서 제주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제주도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이기풍 목사였다. 그는 1907년 최초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들은 다같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길선주목사도 포함되었다. 이기풍은 1908년 초 제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천주교가 외세의 힘을 빌어서 선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이기풍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기풍은 힘을 가진자로서가 아니라 힘 없는자로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선교가 서양의 힘을 배경으로한 선교였다면 이기풍의 선교는 고난의 길로서의 선교였다. 신축교란으로 외세에 대해서 배척하던 제주도에 선교는 쉽지 않았고, 이기풍은 사람을 만나서 전도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난에 지쳐서 쓰러져 있는데, 이것을 해녀들이 보고 구원해 주었고, 그 해녀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첫 번째 전도였다고 한다.
이기풍은 사랑의 헌신으로서 선교하였다. 제주도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홍수가 났고, 여기에 한 여인이 휩쓸리게 되었다. 이기풍은 대동강을 건너던 수영실력을 발휘해서 이 여인을 살려냈고, 이것은 제주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기풍은 병든 자를 고치는 신유의 사역자였다. 이기풍은 초기에 11살 먹은 절름바리를 만났는제, 목포의 병원에 갔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기풍은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고, 이 아이는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KMF Nov. 1911). 이것은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12년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교인 중에 권능을 받아 병고치는 자 많고, 전도인이 전도함에 문이 크게 열렸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박용규, 162). 이기풍의 아내 윤함예는 이미 신유의 체험을 한 사람이었다.
이기풍은 영적 전쟁을 통해서 선교를 했다. 제주도는 미신이 많은 지역이었다. 특별히 뱀을 숭상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뱀을 “뒷집 하라방”이라고 불렀고, 뱀을 위해서 밥도 준비했다. 이기풍은 큰 몽둥이를 들고 뱀을 잡았다. 사람들은 놀랐지만 이기풍의 기도로 죽어가는 환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이기풍의 전도를 받아들였다. 이기풍은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였다.
이기풍은 그 주변에 있는 토착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사역하였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기풍이 제주도에 오기 전에 이미 제주도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이기풍이 오자마자 이기풍과 함께 사역을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박영호가 유배되어 왔고, 이어서 이승훈도 유배되어 왔다. 이들은 제주도민들에게 근대문명에 대해서 말했고, 제주도민들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근대문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기풍은 육지에서 선교를 위해서 건너 온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하였다. 먼저 평양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는 여전도사를 파송하여 주었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 이기풍을 도왔다. 특별히 윤명식목사는 이기풍과 더불어서 함께 사역한 사람으로서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로서 1907년 대부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목포의 부흥운동은 대단해서 교회를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따라서 이기풍과 윤명식의 지도아래 제주도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제주도의 선교는 남장로교회의 도움을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제주도 선교는 독로회 전도국이 담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전라노회, 후에는 전북노회 및 전남노회가 담당하게 되었고, 1930년대에는 재주노회로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다. 그래서 남장로회 노회가 이곳에 성경학교, 간이 진료소등을 설치하여 도움을 주었고, 이런 관계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신사참배와 이기풍의 순교
이기풍 목사는 제주선교 약 10년 후에 제주도에서 나와서 전남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다시 육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 제주도의 삶이 힘들었고, 여기에 실음증까지 생겨서 한동안 쉬어야 했다. 특별히 3/1운동 기간에 그는 전혀 활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3/1운동이후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고,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다시 1927년 제주도에 가서 제주선교를 위해서 일하였고, 1932년 다시 돌아와서 전남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이기풍 목사의 초기 사역이 제주도 복음화로 빛을 냈다면 그의 말기 사역은 순교신앙으로 빛을 발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중심으로 도서선교를 하고 있을 때 한반도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내선일체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미 천주교와 감리교는 여기에 항복하였고, 장로교는 여기에 항의하다가 1938년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순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기풍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이기풍은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일찍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처음부터 우상숭배를 반대해 온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다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와 도서선교를 통해서 강력한 영적 전쟁을 치루었으며,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고 본다. 아울러서 이기풍이 함께 사역했던 남장로회 선교부가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그의 딸의 교육에 대한 입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기풍은 막내 딸 이사례에게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말 것을 교육했으며, 이것으로 불온사상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학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광주 수피아여고에 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폐교되었고, 결국 당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있던 부산 호주 장로교회가 운영하는 일신여고에 진학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일신여고는 전국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 자녀들이 진학해 오는 유일한 학교였다. 하지만 결국 일신여학교도 폐교되고 말았다. 이기풍의 신사참배 반대는 단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교육의 문제였던 것이다.
1940년 순천노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그리고 이미 그의 나이가 70을 훨씬 넘은 나이에 이기풍 목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나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건강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일제는 이기풍 목사를 석방하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2년 6월 20일이었다.
이기풍 목사의 순교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는 평생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이것을 자녀교육에도 실천하였다. 둘째, 일제말 기독교인들은 친미주의자로 몰렸고, 이것이 일제의 기독교 박해의 주요원인이다. 셋째,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인들은 천천년설을 믿었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본의 지배와 대립이 되는 것이었다.

이기풍의 생활과 오늘의 한국기독교
이기풍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 첫째, 교회의 공적 개념이다. 이기풍 목사는 안수를 받을 때부터 전도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왕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순회하면서 사역을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점이 부족하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사모와 공동의 사역을 하였다. 윤함애 사모는 원래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천주교는 독신으로 사목을 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결혼을 해야만 목회를 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사역함으로서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할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셋째, 이기풍 목사는 신앙으로 자녀를 교육하였다. 이기풍은 위대한 신앙인이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신앙은 단지 그 자신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신앙으로 키우는 것을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기풍은 영적인 전사였다. 그는 제주도와 전남의 섬 지방을 주 대상으로 해서 사역을 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단지 도덕만 가지고는 안 된다. 사람들은 복음을 통한 능력을 원한다. 이기풍의 사역은 많은 경우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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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기풍 목사의 선교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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