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장기려 박사의 가난과 고난 섬김의 삶을 기리며
2016/07/29 11:5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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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의 삶을 통한 기독교적 가치 고양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이상규 교수가 장기려 박사에 대해 발제한 원고를 소개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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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선생은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며, 기독자적 가치를 실천했던 의료인이었다.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생을 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제도인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고 청십자의원을 개원하는 등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는 등 섬김의 삶을 사셨다. 그의 삶을 결정했던 행동양식, 신념체계, 그리고 그의 사회적 활동의 기초는 기독교신앙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자신에게는 인색했으나 남에게는 관대한 삶을 사셨다. 그래서 청빈과 가난은 그의 삶의 태도였고, 섬김은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이재 그의 삶의 여정과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생애와 삶
장기려는 106년 전인 1911년 8월 14일(음)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의 한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고향의 의성학교(1918-1923), 송도고등보통학교(1923-1928)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1928-1932)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의전에 입학할 당시인 17세 때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게 해 준다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첫 결단이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던 해 곧 21세 때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고, 장인 김하식의 권유로 백인제(白麟濟)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게 된다. 이때부터 패혈증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1940년 9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나고야(名古屋)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경성의전에서 일했으나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으로 옮겨갔고, 두 달 후 안도선(安道宣, A. G. Anderson)의 후임으로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모략과 질시 때문에 다시 두 달 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심리적 고통이 있었으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 있다. 1943년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楔狀切除手術)을 실시하여 주목을 받았고, 1945년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외과과장으로 약 일년간 일하다가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하게 된다. 김일성대학으로 갈 때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갔고, 이곳에서도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 그는 이곳에서도 신뢰를 받았고,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시련과 고난
평양연합병원에서 질시를 받은 일도 심리적 고통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고난은 6.25전란 때 가족과 별리한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후 평양에서 군용차로 이동하던 중 부인과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영영한 이별이 되었고, 이때의 고통은 그후 45년간 계속되었다. 월남 후 여러 차례 재혼을 요청받은 바 있으나 그후 독신으로 일행을 살았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남하한 그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안고 일생을 살았다.
남하한 장기려 박사는 제3육군병원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다. 그 후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 총무, 서기겸 회계인 김상도 목사, 그리고 초량교회 담임이었던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1951년 6월 부산 영도 남항동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든 도움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복음병원 원장으로 재작하면서 동시에 서울의대 외과학 교수로(1953. 3-1956. 9), 부산의대 교수 및 학장으로(1956. 9-1961. 10), 혹은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 12) 봉사했다.
의료 활동 외에도 장기려 박사는 1956년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다.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였다.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것은 기구와 제도를 통해 섬김을 삶을 지향했던 그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가  1979년 8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이런 봉사에 대한 공적 인정이었다.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1995년 12월 25일 8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신앙
장기려 박사의 삶의 행로를 인도해 갔던 이념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기독교신앙은 그의 삶과 인격과 봉사의 삶을 주형했다. 말하자면 그의 이타적 삶,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 왔던 축이었다. 그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접하게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 이때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서조선』 정기구독자라는 이유만으로 김교신의 1942년 3월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문 “弔蛙”가 문제시되었을 때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었다.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장기려 선생은 김교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기려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자신은 무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가 다시 집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장기려는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곧 집사가 되었다. 그가 평양인민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인 1948년 8월에는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남하한 이후 장기려는 이이라 장로, 박덕술 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산정현교회를 재건했는데, 그는 이 교회로 장로로 봉사하고 1981년 12월 은퇴하였다. 그 후 1987년부터는 흔히 ‘종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에 관여하였고 그가 치료차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필자는 이 모임에서 휠체어에 않아서 예배드리던 장기려 박사와 만난 일이 있다. 평소 제도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고 지냈던 장기려 박사는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매력을 느꼈고,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신앙 여정을 종합해 볼 때, 장기려 박사는 외적인 조직으로부터 자유 한 복음적 신앙에 착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doctrinal integrity)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곧 섬김과 봉사라는 신앙적 실천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실천적 삶: 사랑과 섬김
그의 실천적 삶의 측면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랑을 실천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을 통해 위로 하나님을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섬기는 생애를 살았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의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외연이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의 삶의 철학이었다. 그가 복음병원장직에서 은퇴한 이후 청십자의료조합과 청십자의원을 개원한 일이나, 부산의 아동병원, 거제도의 애광원, 그리고 보건원의 자문의로 봉사한 것도 이런 정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실천적인 사랑과 선의(goodwill)는 그의 일관된 삶이었다.
둘째, 무사무욕(unselfishness)의 삶을 사셨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수단이었다. 그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했고, 물욕에나 명예욕에 빠지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나 그가 남기고 간 유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없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는 그 작은 소유조차도 부끄러워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고신의료원 3동 8층 옥탑방에 가보면 그의 세간이 얼마나 단출했던가를 알 수 있다. 개인기록과 사진첩, 늘 입고 다니던 옷가지가 전부였다. 책이라고는 십여권의 의학서적과 성서조선(聖書朝鮮),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전집, 그리고 야나이하라 다대오(矢內原忠雄)의 강해집이 고작이었다.
성산은 사리나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 부의 추구를 가능케 해 주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필자와의 대화에서도 한국교회의 지나친 물량적 성장제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 일도 있다. 무사무욕은 한 시대를 이끌어간 명의(名醫)로서 갖기 어려운 삶의 태도였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사랑과 배품의 윤리를 실천했다.
사실 청빈과 무소유는 기독교전통에서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권장되어 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살고자 했다.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았으나 그 시대의 가치로부터 자유했던 심리적 이민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나그네와 행인 같은(벧전2:11) 역려과객(歷旅過客)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이들을 파로이코이(παροικοι), 곧 ‘나그네’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런 삶의 방식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페레그리누스(peregrinus)였다. 영어의 필그림(pilgrim)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이 말 속에는 소유욕과 배치되는 비영속성, 일시성, 잠정성 등의 의미가 있다. 소유에의 욕망은 세욕이었고, 낯선 가치였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장기려의 삶이었다.
셋째, 함께 사는 사회(togetherness) 추구했다. 장기려의 생애가 보여 주는 또 한 가지 이념은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상부상조, 공생과 상생은 그의 윤리였다. 근본적으로 그의 모든 것, 곧 소유, 학문, 학위, 명예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같이 살기 위한 것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조합운동을 시작할 때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자”는 공생(共生)과 상상(相生)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1975년에 부산 수정동에서 청십자 의원을 시작한 것도 가난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행려환자의 구호, 기독의사회를 통한 구급활동, 간질병환자를 위한 장미회의 운영,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운동, 이것은 공생과 동거(同居)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형제애를 강조하되, 북한의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함께 사는 사회’는 그의 일관된 신념이자 실천 강령이었다. 결국 그는 사랑의 보편주의(love-universalism)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네번째, 장기려 박사는 종파주의로부터의 자유 했다. 그는 순수한 복음적 믿음을 추구했지 교파나 교단이나 인간이 만든 외형적 조직에 메이지 않았다. 그는 특정 교파나 교단을 절대시하거나 독선주의나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무교회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성의 조직교회를 경시하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면서도 무교회 신앙이나 케이커교도와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그는 교리우선주의나 교파주의적 오만에 빠져 남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신앙만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그는 외형보다는 순수한 복음을 지향했다. 말하자면 그는 신앙의 정통성(Orthodoxy) 보다는 신앙의 정체성(Identity)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가 이해한 기독교 정체성이 바로 남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이타적 섬김과 봉사였다. 
다섯째,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s) 고양했다. 그는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기독자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의 행태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다. 동시에 그는 기독자적 삶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를 움직이는 이념이자, 초석이었다.

맺는 말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성산 장기려의 삶을 결정했던 신념, 행동양식, 사회활동은 기독교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장기려 박사에 있어서 사랑, 섬김 혹은 봉사에 대한 단순한 인도주의적 접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생애와 삶의 여정이 인도주의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의 삶과 실천은 바로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신적 명령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래서 의료인으로서 그의 모든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였고, 이차적으로는 인간을 섬기는 행위였다. 장기려 선생에게 있어서 의사라는 직업은 더 높은 신분에로의 부름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도구였다. 이것이 그의 소명(calling)이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두 측면은 그의 생애와 삶, 의료 활동을 이끌어간 두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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