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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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 만경 출생
곽진근(郭塡根·1897~1941.12.13) 목사는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서 부농(富農)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9년 고향에서 만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도와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이 즈음 이곳 만경지역을 드나들며 선교를 하고 있던 군산선교부(Gunsan Station) 소속 선교사들 중 미국 남장로교 소속 부위렴(Rev. William Ford Bull, 1899~1941 활동)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동시에 만경교회에서 부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신앙의 은인 부위렴 목사는 미국 버지니아(Virginia)주 노포크에서 1876년 출생하여 1941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1889년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북 군산 선교부에 부임하였고, 1902년 엘비(Albey Libbie. A) 양과 결혼하여 함께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지역인 군산에서 주로 개인전도(Field Work) 및 천막전도, 복음부흥전도단을 조직해 순회전도에 힘썼다.
한편 부위렴은 전킨(Rev. William. M Junc Kim 전위렴) 목사를 도와 군산지역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김제와 옥구(玉構)지방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또한 1915년엔 전라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되어 초기 조선교회 행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1920년에는 전북노회 회계로 재정담당 업무를 담당하며 노회발전에 기여를 하는가 하면, 1920년 전북지방 교회진흥운동을 제창, 교회성장과 노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사역으로는 군산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발전에 힘썼다.
1941년 미국으로 귀국한 후 그 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151-152 참조).
곽진근은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전북지방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인 전주농업학교(全州農業學校)에 입학, 그 곳에서 5년간 교육을 받으며 조선민족의 살길은 농업뿐이란 생각을 불태웠다. 이 즈음 기도하던 중 소명을 받게 되어 선교사와 의논 끝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 낭독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
1940년 제29회 총회서 43세로 총회장 당선
신도의식 ‘미소기하라이’장려 앞장
모든 목회자 창씨 개명 명령

1923년 드디어 곽진근은 후일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길, 김충한, 장규명 등과 함께 제17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전북노회 산하 삼례읍교회(1903. 3. 5 설립) 청빙으로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정식으로 목회전선에 나서 교회부흥에 힘썼다.
1925년에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金山敎會 1906. 2. 2. 설립)와 같은 면에 있는 원평교회(院平敎會 1908. 3. 5. 설립) 두 교회의 합동청빙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1937년에 와서는 정읍군 신태인읍교회(新泰仁邑敎會 1923. 5. 8. 설립)와 같은 신태인면에 있는 화호교회(禾湖敎會 1903. 7. 1. 설립) 양 교회의 공동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현장에 헌신하였다. 신태인읍이나 화호지역은 당시 일본인지주(日本人地主)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화호지역은 일본의 거대한 <구마모도> 농장(農場)이 있었다.  
세계 제2차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 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던 때 그는 화호교회 당회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를 지지하자는 안건을 솔선해 전북노회에 제의한 적이 있는 터였다.
당시 전북노회에서는 이 안(案)을 받아들여 전주도제직회(全州都諸職會)에서 의견 수렴을 한 후, 1938년 9월 개최되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헌의했다.
당시 총회서기로 있었던 곽진근 목사는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을 친히 총회석상에서 낭독하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곽목사는 1939년에는 전북노회장에 선임되었고, 총회의 중책인 서기직을 두번이나 수행하는 수완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26~127 참조).
곽진근 목사의 친일행각은 1939년 전북노회장에 재선된 같은 해 9월, 노회장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를 겸한 때부터라 보여진다.
같은 해 10월 전주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지맹(全北老會支盟)을 결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에서는 최연소 총회장에 당선되는 영광도 누렸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182 참조).
1940년 9월 6일부터 13일까지 평양 창동교회(倉洞敎會, 1905. 1. 22. 설립, 김화식 목사 시무)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목사회원 91명, 장로총대 91명, 선교사회원 14명, 총 196명의 회원이 참석함으로 역사적인 총회가 개회되었다.
당시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는 성경 요한복음 21장 15절~21절까지를 봉독한 후 “봉사의 본질은 사랑”이란 제목으로 은혜로운 메세지를 전했다. 이어 회원 호명이 끝나고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총회장이던 경남노회의 김길창(金吉昌) 목사를 제치고 당연 43세에 불과한 젊은 곽진근(郭塡根)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회의 중에는 외부인사로 일본 기독교대회  가네이 목사, 일본신학교 무라다 목사, 복음신문사 주필 도가히가 참석해 각각 축사를 했으며, 일본 기독교대회에서 1940년 4월 개교한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 목사)에 1천엔(日貨)의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보고에 전 총회회원들은 기립박수를 했고, 총회에서는 총회장 명의로 감사장을 보내기로 가결하였다.
1938년 장로회신학교가 선교사들의 철수로 문을 닫게 되자, 소위 서북세력들의 교회는 평양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친일파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신학교 교장으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채필근 목사를 세운 것이다. 소위 이를 가르켜  채필근의 평양신학교라 불리게 된 동인이 된다. 이에 반응해 경성(서울)에서는 승동교회 1층에서 당국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이란 이름으로 등록하고 1940년 4월 개교를 단행하였다.
여기에도 친일적인 행각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총회선교부장 최지하 목사는 총회에서 “중국산동성 경내에 황군(皇軍)의 공헌으로 치안이 잘되어 선교사업이 편리하게 되는 일이오며”라는 아부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1940년 12월엔 전선장로회 신도대회를 경성부민회관과 신문내교회(새문안)에서 열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으로 개편하여 자신이 이사장을 맡았다.
1941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시로 각 노회장과 각 교회 애국반장 앞으로 계불(미소기하라이)의 점진적 보급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발송, 신도의식(神道儀式)인 미소기하라이()를 장려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같은해 4월 29일 천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신대대회>를 개최해 총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게 하여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또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써 “신체제운동과 총후에 처한 기독교인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국권을 상실한 시대의 현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한국교회로서 지도자들의 굴욕적인 친일활동은 두고두고 오늘까지 한국교회의 상처가 깃든 아킬레스건으로 이어지고 있다(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같은 책 p.182 참조).
곽진근 총회장 재직시 총회의 중요 결의 사항을 보면, ① 용천노회의 분립을 가결하다(용천과 영구노회로). ② 이기풍 목사(80세)를 총회 원로목사로 추대하기로 가결하다. ③ 장로회보를 발행하기로 하고 이를 각 교회는 의무적으로 1부씩 구독하기로 하다.  ④ 각 노회는 포교에 종사하는 교역자 및 포교자의 이력서를 수집 비치해 조사상 필요시 활용토록 하다. ⑤ 모든 목회자는 창씨 개명한 후 그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기로 하다.
제29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시대를 잘못 만나 친일적인 인사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간 불운의 지도자로 남게되었다. 역사는 곧 심판이라고 했다. 그는 1941년 총회장이 끝나고 그 해 말(1941. 12. 31) 4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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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29회 총회장 곽진근(郭塡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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