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1.jpg평북 안주 출생
최지화(崔志化 1884-1950) 목사는 1884년 평안북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최지화가 기독교에 입신(入信)한 후 출석한 교회가 성내교회(城內敎會)였다. 당시 성내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의 권유로 교인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김정선 장로가 세운 유신학교(唯信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신식교육 기관이어서 최지화도 부모들의 권유로 이 학교에 입학하여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였고, 1911년 선교사들이 경영하고 있던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엔 숭실대학(당시는 전문학교)을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숭실대학을 거친 후, 1917년 1월 평양노회의 입학허락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학업을 진행 중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 일제당국의 요시찰인물이 되어 신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진학하여 1923년 7월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로 장립 받기 전, 1919년 안주읍교회(성내교회의 전신)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장로로 시무하면서 안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장래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준비하던 중 3.1독립만세 사건에 연류되어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하고 금릉대학 신학과를 마친 최지화는 안주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자마자 1924년 안주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후에 평양노회 소속 연화동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평양노회로 이명했다. 이후 그는 평양노회(平壤老會)소속으로 총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목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생활고를 모르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보통학교 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성직자가 되었기에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안에서는 실력 있는 엘리트 목사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에 티라 했던가.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당시 식자(識者)들이면 모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친일사건이 늘 그에게 그늘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친일행적을 일견해 보면, 1919년 1월 제15회 평남노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았는데, 같은해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열린 조선독립 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윤원삼(尹愿三), 김선두(金善斗), 강규찬(姜奎燦), 도인권(都仁權) 등과 함께 참가했었고,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김구(金九), 도인권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는 호소문과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12월 중국 안동현(安東懸)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병찬(安秉燦)을 총재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할 때 교육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1920년 4월 제2회 총회에서는 신설된 서무부장을 맡았다. 같은 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사(軍務部 參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숭실대·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한 엘리트
한때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활동
주기철 목사 면직 처분 결의 당사자
일본제국군 위해 전투기·교회종 헌납
일제에 항거하지 못한 지식인의 나약한 면모 보여

1921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화동유학생연합회(高麗華東留學生聯合會)를 조직할 때, 주요한(朱堯翰)과 함께 금릉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써 의사부(議事部)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평양에서 교육강연(敎育講演)을 하였다. 1924년 6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로 있다가 안주노회(安州老會)로 옮겨 그해 12월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안주서교회(安州西敎會)를 거쳐 안주중앙교회와 평양연화동교회를 담임하며 목양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9월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評議員)을 맡았고, 동년 12월엔 평양노회장으로써 임시노회를 소집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목사면직처분을 결의했다.
1940년 3월 20일엔 자신이 시무하던 연화동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양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 겸 평의원까지 맡았다.
1940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88-789참조).
1941년 11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제30회 총회가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목사회원 104명, 장로회원 104명(미참 1명) 207명의 총대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 선교사 대표는 한 사람도 참석치 않았다. 일제 당국이 적성국가로부터 와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곽진근 목사는 국가의례를 먼저 거행한 후 부회장이던 최지화 목사는 성경 딤후 2장 5절을 봉독하고 현시국에 기독교인의 생활표준 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서기의 회원 점명이 끝나자 절차 위원장인 이인식목사가 총회 회의순을 보고 하였다.
그 회의순서에 따라 제30회 총회 기념식 현장에서 시난극복(時難克服)이란 결의문을 발표하고 지나주둔황군사령관(支那駐屯皇軍司令官)에게 전보(電報)를 보내기로 가결한 후 임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총회장에 최지화 목사, 부회장에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튿날 11월 22일 오전에는 총회 총대 전원이 총회장 인솔하에 처음으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참배하고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예배 후 다시 회의장인 창동교회(倉洞敎會, 1905. 1. 22 설립)로 이동하여 평안남도 후까이 고등과장의 강연을 들을 후, 다시 총회장의 인도로 ① 국기경례 ② 개회사 ③ 궁성요배 ④ 국가봉창 ⑤ 묵도 ⑥ 서사제창 ⑦ 찬송가(제7장) ⑧ 기도 ⑨ 성경 ⑩ 총회년혁보고 ⑪ 기념사 ⑫ 선언 ⑬ 고사(告祀)  ⑭ 축사 ⑮ 찬송가(3장) ⑯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미 중일전쟁(일명 支那事變)으로 일본 황군(皇軍)들은 동남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러한 운의 시기를 맞이한 총회는 산하 각 노회로 하여금 조선장로교애국기상당수(朝鮮長老敎愛國機相當數 일본제국군전투기구입모금)를 헌납하기로 작정하고 그 헌금은 유아세례자와 실종자를 제외하고 교인수 비례로 1인당 1엔씩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일로 최지화 목사는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는 친일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숙청대상자가 되었다. 이 당시 애국기(愛國機) 헌납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각 노회마다 기성회(基成會)를 조직해 그 기구를 발족한즉 실무자로 위원장에 정인과(鄭仁果 제24회 총회장 역임) 목사, 서기에 장홍범(張鴻範 제22회 총회장 역임) 목사를 각각 선임하였다. 특별히 충남 부여 신궁 건설에 전국노회 대표 72명이 1941년 10월 31일 봉사했음을 보고 받았다.
한편 최지화 총회장은 1942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이 주최하는 지방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었다.
같은 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위원을 겸했고,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 각 노회 연맹 이사장들에게 교회종을 헌납한 상황을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백남준, 이상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만3221원 28전을 헌납했다.
1942년 9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간담회 감리회 박연서, 이동욱, 장로교 전필순, 정인과, 성결교 이명직 등과 함께 참석해 일본기독교단 통리 토미타(富田滿)로부터 기독교 각 파의 통합을 권고받고 교파통합을 논의하게 되었다(친일인명사전(제3권) 같은 책 p.789 참조).
해방후엔 더 이상 교회에서 목회 할 수가 없어 사임하고 모교였던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0년 6.25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지화 목사가 재임했던 재30회 총회결의 안건 중 중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1941년 11월 22일 총회 총대 일동이 개회 이튿날 아침 평양신사에 총회원 전원이 신사참배하다.  ② 부여신궁 건설에 전국 각 노회 대표들 72명이 자진 근로봉사 하다. ③ 1941년 6월 30일 금강산 기슭에 있는 교단 총회 수양관을 철거하기로 하다. ④ 총회설립 30주년기념예배를 장대현교회에서 드리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법도 없지만 좋지않은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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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제30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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