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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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시끄럽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발화된 소위 ‘최순실 게이트’는 그 중심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주말이면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주부, 직장인, 근로자, 노인 할 것 없이 남녀노소가 이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통신들이 앞 다투어 보도할 정도로 실로 거대한 촛불시위가 온 나라에 뜨겁다. 다섯 번의 촛불시위와 이에 따른 세 번의 대통령 사과담화가 있었지만 끝이 아니다.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자꾸 아니라고 해도 이미 국민은 알건 다 안다. “나는 결코 사익을 추구한 일이 없다”고 말해도 국민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양파껍질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대통령의 개입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나도 “나는 아니다”라고 잡아 뗄 수 있는가. “나는 사교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고 해명해도 국민들은 사교 말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대통령의 행태에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통령이 ‘무당 최순실’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변명처럼 단지 어려울 때 도와주고, 함께 있어 준 그 인연 때문인가? 소가 웃을 일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상하리만큼 권력을 비호하고, 권력자들의 대변자노릇을 자처한 적이 많았다. 하기야 반공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권력층과 기득권자들에게 쏟아 부어도 당연시하였다. 그래야 나라가 잘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분단된 나라에 살면서 극심한 이념갈등으로 어지러울 때, 교회가 한편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도 꽤 많았다. 그러나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마구 도매금으로 넘겨온 교회가 이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교회성장이 목회성공의 목표가 되고, 축복이 곧 번영과 형통이라는 주술에 걸려 기복주의로 치닫던 교회가 안팎에서 욕을 먹고 있다. 그래도 정작 교회는 무덤덤하다. 나라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말을 해도 뻔뻔하다. 심지어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인 지지와 비호를 한 어떤 목사는, ‘대통령이 사교에 빠졌으니,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자’고 강단에서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이 말장난의 유희가 되어 버리고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언젠가부터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유명목사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형교회를 세우면 마치 자신이 대단한 능력의 종이 된 것인 양 행세한다. 교회가 부여한 영적권위를 권력으로 생각하며 으스댄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다’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이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 교회는 왕국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요, 장막이다. 더 이상 교회를 왕국으로 착각하거나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한다. 교회규모와 교인숫자로 교회를 평가하거나, 이를 무기삼아 기독교지도자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기독교지도자가 되려면,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인 판단과 예언자적인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성서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해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이 아닌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온 나라가 비탄에 잠기고, 모든 국민이 참담해하는 이 때 교회는 대림절을 맞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며, 소망과 기쁨을 말해야 하는 한국교회가 온갖 불협화음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실로 깊은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대하여 말하고 전하고 외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천년 전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헤롯 왕에게 퍼붓던 그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이 시대의 불의한 권력과 지도자들을 꾸짖어야 한다. 교회지도자들은 어떤 자리에서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 주신 영적 권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세상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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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쩌란 말인가-강 경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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