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1.jpg
 
◇예수님은 그 해 유대력 니산월 14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유월절 어린양(고전 5:7)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가 안식일이 지난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다. 이는 성경이 명백히 기록한 날자여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날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기독교는 이 ‘부활절 날짜’를 놓고 오랜 논쟁을 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대속의 죽으심을 중요시 할 것인가, 주의 부활일을 중요시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즉 부활절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주 중(7일) 어느 날이 되든지 유대력 니산월(첫달) 14일에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주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도 시대가 지나고 주후 2세기에 이르면 교부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교회는 세 가지 절기를 지켰다. 그것은 유월절(부활절)과 오순절 그리고 주현절이 그것이다. 기독교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파스카 스타로우시몬(Pascha Staurosimon, 본 유월절)이라 불렀고, 바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일을 부활절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슬픈 날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곧 이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 동시에 이어졌다. 그래서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은 니산월 14일에, 유대교 유월절에 맞추어져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15일 해뜰 때까지 유대교의 유월절 양 대신, 성찬과 애찬으로써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인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 그래서 이들은 ‘14일파’라고 불렸다.
◇소아시아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 교회는 기독교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의 날’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님이 죽으신 니산월 14일에 맞추다보면, 그 날이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니산월 14일에 맞추는 수난 기념일은 기독교의 부활정신과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부활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313년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자,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세계기독교공의회가 모였는데, 그 회의에서 조정된 것이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성경적 부활절을 주장한 ‘14일파’는 오히려 이단으로 몰려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그런데 이 부활절 논쟁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에 관한 문제도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 초대 교회에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2세기에 이르러서는 차츰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아의 결정은 기독교 교회력의 독창성과 그것이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는데 있었다. 초기 기독교가 부활절을 ‘12월 25일 성탄절’과 같이, 어느 한 날자를 정하지 못한 것은 주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 때문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부활절 논쟁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