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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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구례 출생
문재구(文在球 1902.4.24-1981.2.4) 목사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출생하였다. 구례(求禮)는 동으로는 하동군, 서는 곡성군, 남은 승주군과 광양군 북은 남원군과 인접해 있다.
이 지역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찌기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보면 이 지역에는 1908년(戊申年)에 장성(長城) 율곡리교회, 강진(康津) 학명리교회, 장흥(長興) 석금리교회와 더불어 구례읍교회가 설립되었다(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 上, 차재명 편, 기독교창문사 1928, p.259-262 참조).
문재구 소년이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왕조가 500년 간의 수명을 다하고 외부로부터 개방을 요구받으며, 미래를 내다 볼 수 없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한말의 어수선한 시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정치가 혼미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먹는 문제와 생활에 여유가 있을 수 없었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희망이 있을리 없었다.
당시의 경제사정은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어가고 있었고, 관리들의 학정이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봉기로 이어지고, 외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남해안과 서해안을 제집 드나들 듯 날뛰고 있으니 일반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이럴 때쯤 기독교 복음이 조선의 남단 전라도에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전해졌다. 목포와 광주에 이어 전주와 순천을 거쳐 이곳 구례땅에도 구원의 복음이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전파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이 지방에 첫 발걸음을 내대딘 선교사는 배유지(Eugine Bell, 1868.4.1-1925.9.28, 裵裕祉)였다. 배유지 목사는 1868년 4월 1일 미국 캔터키주 스코트선교구에서 출생, 1891년 센트럴대학교를 졸업한 후 1894 켄터키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73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나주, 목포 등에서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이다. 그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먼저 여의고 잠시 귀국했다가 1904년 12월 다시 내한하여 수피아 여학교와 숭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광주기독병원 설립에 공을 세우기도 했고, 1911년 10월 15일 전라노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이어 1914년 선교사로 예장 제3회 총회장이 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191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1925년 9월 28일 광주에서 오랜 격무로 병고로 사망했다(내한서교사 총람, 김순태 박혜진 공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123 참조).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38회 졸업 목사안수
순천신학교·총회신학교 강사 역임
“절대신앙, 절대순종”이 목회철학
“WCC·NCC에 가담한 목사 강사 초청 않기로
김화복·박덕종·양춘식 등 신비주의 운동가들 집회 강사로 초청 불가”


구례읍교회 설립과정을 잠시 살펴보면, “求禮邑敎會가 設立하다 先堤에 本郡居高鉉表가 多年 外國에 체류하다가 歸來後 救世軍이라 自稱하고 同地에 傳道하야 信者가 百餘人에 達함에 六拾圓을 捐補하야 鳳南里에 家屋을 買收하고 禮拜堂으로 使用하더니 義兵의 亂을 因하야 敎人은 離散하고 禮拜堂은 日兵의 占據가 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上 1928, 기독교창문사, p.262 참조).
재구 소년은 고향에 설립된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영적세계와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21년에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이듬해 1922년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1923년 선교사들이 세운 순천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4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38회로 졸업하였다. 그해 가을에 목사로 장립받고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고향의 구례읍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23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농촌진흥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45년부터 1963까지 순천노회가 세운 순천보통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46년부터 1966년까지 순천시 가곡교회(1920년대 설립) 위임목사 시무 후 원로목사로 추대받았다.
1954년 순천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그는 총회장이 되기 전에도 이미 1957년엔 순천신학교 이사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58년에는 한성신학교 이사와 같은 해에 교단내 호남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운영하는 총회신학교 강사와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다시 1968년 예장 제53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1969년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장충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4회 총회에서 역경과 고난 가운데 부름받아 신앙의 맥을 세운 그에게 교단의 수장(首長)의 위치인 총회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그의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설교 한편을 요약 소개한다. 성경본문 시편 116편 12절을 통해 <여호화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제하의 설교를 살펴보면, “부족한 종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감사하고 더우기 늦게나마 종의 직분까지 주셔서 주의 몸된 교회를 봉사할 수 있게된 것은 제가 받은 축복 중 축복입니다. 내가 걸어온 신앙의 길에는 물론 부끄러운 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간증할 수 있는 몇가지를 피력하고자 합니다.”라고 전제하고서는, 그 첫째가 예배 성수의 문제(主日聖守)가 가장 큰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통의 어려운 핑계로 성수주일을 범하지 않는 기쁨과 감사로 평생을 보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로 생각하였다.
둘째로는 평생을 교역자이면서도 타교역자의 요청이나 상회 지도자에게 존경과 순종으로 일관해 살아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며 살았다.
셋째 자기의 삶이 과연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희생과 봉사의 자세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주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였음을 설교문을 통해 고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결론적으로 문 목사는 자기의 지나온 길을 가만히 돌아다보면서 늘 감사한 것은, 불충분하고 불의한 종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늘 붙들어 주셨다고 진솔하게 설교에 나타내보였다.
이와같은 절대신앙과 절대순종과 헌신이 바로 문재구 목사의 철학이요 목회관이었다고 생각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편, 예장총회 출판부 2015 서울, p.55-58참조).
마지막으로  문재구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임했던 제54회 예장총회 결의안을 잠시살펴보면, ① 차남진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하다. ② 전북대회 조직을 허락하다. ③WCC와 NCC에 가담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지 않기로 하다. ④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박형룡 목사를 인준하다. ⑤ 산아제한에 대한 문의건은 성경원리상 불가하다. ⑥ 대통령·정부·국회에 다음사항을 정책부에 맡겨 심의 건의하기로 하다.(문화재란 명목하에 사찰에 국고를 지원하고 있는 일, 예비군 훈련에 있어서 목사 전도사는 훈련에 있어 대신 교양지도를 할 수 있게 해 주실 일, 교회당 300m 부근에 오락실을 설치하는 일, 지방신학교와 성경학교에 당국이 간섭하는 일, 주일성수 문제에 관한 일, 군목·군승의 공동의식 반대에 관한 일). ⑦ 주일에 일반학교에서 각종행사를 하는 일에 대하여 정부 당국에 건의토록 하다. ⑧ 성직자 활동 한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확인하다(목사의 정치활동에 관하여서는 제38회 총회결의대로 한다. 정교분리와 양심자유의 기본원리를 존중하되 집단조직 행동에 참가하지 못한다. 성직자는 언제나 복음설교와 말씀을 파수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신성과 권위를 위해 조심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한다.) ⑨ 불경건한 신비주의 운동과 김화복, 박덕종, 양춘식 씨와 WCC, NCC 노선에 가담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는 일과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금지하기로 하다.
그 어느 총회보다 교단 내외의 이슈가 많았던 총회였던것 같다. 문재구 목사는 목회자의 모범을 몸으로 실천해 승리한 지도자요 한 생을 오로지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만을 외치다가 간 우리 목회자들의 전형이었다. 파란만장한 한 시대를 살며 복음의 역군으로 우뚝선 호남의 대표적인 초기 교회지도자였다.
1981년 2월 4일 79세의 일기로 그렇게 소망하며 살다가 주님의 나라로 영민하였다. 그의 아들 문인협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서울 강일교회를 섬기다가 일선에서 은퇴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저, 성은출판사 1978 서울, p.3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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