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6월 8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진행한 6월 월례회에서 박종화 목사가 발제한 ‘새로운 통일선교전략 방향’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8.jpg
 
1. 평화의 때 도래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단순히 예측가능한 시대사적 내지 역사현실의 변화의 틀에서만 보지 않는다. 역사의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시대사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징조(Kairos)를 간파한다. 1988년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평화의 축제로 열렸었다. 그 이전 1984 LA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동서 양진영의 핵무장 경쟁을 비롯한 냉전대결이 최고도에 처한 상황에서 동구권 국가들이 집단으로 불참한 반쪽축제였었다.
하지만 88 서울올림픽에는 전 세계 각국이 모두 참여했다. 이 올림픽이 지나고 1989년부터 시작하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집단 몰락했고, 분단된 독일은 통일을 성취했다. 이를 우연의 특이한 역사발전 정도로 평가하기에는 역사적 반등과 반전의 폭과 깊이가 너무도 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현상을 목도한다. 독일통일은 바로 이런 역사변혁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동승한 결과이며, 급기야 지루했던 적대적 냉전구조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일단 종식되고 말았다.

2. 독일통일에 기여한 독일교회의 교훈 
동서독 교회는 지역단위 또 개 교회별로 자매결연을 맺고 동독교회의 예산의 거의 절반정도를 서독 측 교회가 지원했다. 17년간 총 56억 DM(약 33조원)을 지원한 셈이다. 절기만 되면 버스나 트럭에 온갖 선물꾸러미를 가득 싣고 서독 측이 동독 측을 방문했다.
이미 라디오와 TV 시청이 양 독 정부 간에 합의된 터라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특히 매체들의 가전제품이나 각종 문명의 이기들에 대한 상품광고가 호기심도 자극했다. 동독 땅을 지나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고속도로를 서독측이 닦아주고도 통행료는 동독 측이 꼬박꼬박 챙기는 실리를 주기도 했다. 물론 통행의 주인공은 거의 서독인들 이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서독의 침묵하는 손길이 동독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사실이다.
서독 사람들의 동독방문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동독인들의 서독방문에는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일례를 들면 동독에서는 연금과 생활보조를 줄이려고 노인 이산가족의 서독방문을 허용하면서 가능하면 동독에 돌아오지 말고 서독에 계속 머물러 살라는 분부까지 했다는 말을 당사자들한테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인들은 두고 온 식구들이 그리워 거의 다 동독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활발한 젊은이들은 어쩌다 귀한 서독 방문기회를 얻으면 서독에 주저앉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방문 전 반드시 돌아온다는 서약을 했는데도 말이다.
1989년이 시작되면서 동독 측에도 변화의 물결이 급격하게 생겨났다. 라이프치히 시내의 복판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Nicholaikirche)를 중심으로 월요일 저녁마다 촛불을 손에 들고 평화기도회를 개최했었다. 점점 인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동독의 비밀경찰과 안보요원들의 이상한 기류를 직감하고 감시와 방해공작을 했다. 그런데 방해하면 할수록 인파가 늘었다. 충돌하면 할수록 더 늘어났다. 당의 핍박은 이들을 오히려 강한 의식화와 단결로 내몬 것이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동베를린을 비롯한 큰 도시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평화촛불 기도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우리가 독일민족”(Wir sind das Volk)이라는 구호로, 곧 분단 속에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민족으로 출발하더니, 나중에는 “우리는 이제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는 통일지향의 민족적 일체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발전되기 시작했었다. 독일주변 4강 점령국들이 나중에는 통독에 합의하는 쾌거가 있었지만, 동서독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미 내적통일이 싹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셈이다. 평화에의 열정이 뜻하지 않게 등장한 통일이라는 그릇을 채운 셈이다. 사실 필자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양독 시민들이 운집한 가우데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음악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나오는 “기쁨의 노래”(Ode zur Freude)를 “자유의 노래”(Ode zur Freiheit)로 가사를 바꾸어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천지를 울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통일 자체도 반갑지만 통일이 가져다준 “자유”가 더 반가웠던 가보다.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제의 광경이었다.

3. ‘평화 공존’ 살기
평화공존 시대의 선교와 교류협력에는 몇 가지 견지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말은 북한에는 주체 사상적 공산체제가 지배하며, 남한에는 자유민주체제가 지배함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공존은 바로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는 바로 남한교회의 공식적인 접촉의 파트너인 <조선 그리스도교인 연맹>이 남한 교회와 성격과 구성이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동독교회는 과거에 스스로를 사회조의 체제에 “귀속되는” 교회(church of socialism)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church for socialism)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체제 “속에 몸담고” 살지만 정체성은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church in socialism) 자기고백을 천명했고, 서독을 비롯한 세계교회는 이를 수용했다. 북한의 <연맹>도 또는 어떤 형식의 미래교회도 이런 성격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리라고 본다.
다만 남한교회에도 해당하지만, 북한교회의 경우에도 일단 교회의 모습을 띠고 사는 한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어 가시리라는 확신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보면 북한을 향한 남한교회의 선교계획은 평화 공존적 틀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남한교회 식의 교파분열은 결코 북한에 유입되거나 추천될만한 틀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파교회가 아니라 북한식의 “연합교회”가 가능하며 또 바람직함 모델이다. 교파중심의 분열된 선교방식 역시 불식되어야 한다. 분단 자체도 불식의 대상인데, 분단 속의 또 다른 교파분열은 당연이 불식과 극복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사회적 현실에 적합한 선교 모델은 북한이 외형과 체제상으로 갖추고 있는 “마을별 복지체제”를 선교협력의 실천적 장으로 삼자는 것이다. 예컨대 200여개의 군마다 있는 보건소를 실제로 주민건강을 돌볼 수 있는 내실 있는 보건소로 회복시켜주는 디아코니아 선교 말이다. 여기에 탁아소, 모자보건 진료소, 유치원, 학교 등등의 복지시설의 내실을 채워주고 운영을 지원함으로서 진실로 민생중심의 선교봉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관 속에서 영적 보살핌과 훈련을 담당할 소위 “복지 중심의 교회”를 북한 지역과 합의하여 거부감 없이 다양하게 설치해 갈 수 있으리라 본다.
또 하나 대북 선교지원의 문제이다. 적어도 지역단위별 선교지원이 기본적인 틀이라면, 지원의 기본정신은 공여자의 뜻이 아니라 수혜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모든 지원과 협력에 있어서 갑을관계 내지 주객도식은 과거의 식민주의적 방식으로 의롭지도 않고 효율성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과의 교류협력에서 특히 중시해야할 요목이다. 동시에 지원은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현금이 아닌 “현물” 내지 “물품”으로 해야 옳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상의 고난 상황을 고려하여 “물고기”를 제공하는 것은 좋으나 가능하면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고 지원하는 “기술”과 “자본”의 투자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지원이 의존을 낳기 보다는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원 속에 “평화 만들기”가 실체화 되며, 통일을 부분적으로나마 부분적으로 나마 미리 맛보고 나누는 것이 된다. 곧 인도주의 차원의 교류협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설령 정부 당국끼리의 부정적 대결과 갈등의 상황에서라도 인도주의 지원은 “단절 속의 연속”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이 교류협력은 상대가 북한의 백성이다. 북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도 “체제”의 희생양인 백성을 도와 마음을 사고 결국에는 통일을 위한 협력 축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25-37)에 나오듯이 “강도만난 동포”를 돕되, 이념과 교조주의에 충실한 레위사람이나 제사장처럼 “체제가 싫기 때문에 ‘골치 아파!” 하며 도피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체제갈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체제는 싫지만, “희생당한 동포의 사정이 너무도 가슴 ‘아파’!” 하며 선을 베푸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학술/ 한복협 6월 월례회 ‘남북/북미 정상회담 이후 통일선교 방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