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2
2018/11/09 16:0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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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선지자(요한 4: 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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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4장은 1-42절은 사마리아 여자와 수가 동네 사람들의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한 개종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43-54절은 죽어가는 왕의 신하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이후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양식이 요한이 쓰고 있는 매 장의 전반부는 Narrative, 그리고 후반부는 Narratve에 대한 Discourse 의 구조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사건을 분리해서 설교한다. 본문이 길고, 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사건을 무리하게 붙여서 설교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간단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고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45). 이후 그는 고향 갈릴리 지방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4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 존경 받지 못할 상황을 미리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일부의 주석가들의 주장처럼 문맥에 맞지 않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삽입된 구절인지 좀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다음 절은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떼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다(45).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꼭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예수께서 마치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하신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 후에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가 자기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 내려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는 아마도 헤롯 왕의 신하였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당시의 국경 주변 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국경 사무 관리들이 그곳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당히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신하는 다시 똑같은 간청을 한다.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50)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 예수님이 대답이었다. 그때 그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이적이나 놀라운 일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들었고, 그래서 예수께 오셔서 그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는데, 예수께서는 표적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사 말씀하신다. 아마도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았다. 2:23-25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맡긴다”(entrust)는 말은 흔히 쓰이는 “믿는다”(believe)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들에 대하여 자신을 믿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역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았다”(But Jesus on his part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em. ESV, NET, NAS)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았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표적을 보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아셨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본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 영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게 환영받지도 못했고, 존경받지도 못했다. 본문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는 데 왜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 왕의 신하와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의 근본적인 다름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이적을 보고 영접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길고 긴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자신들의 영혼에 대한 말씀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역사적으로 기다려온 메시야시오, 세상의 구주라는 결론을 내리고 믿고 고백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증언한 여자의 말 때문에 ... 예수님을믿었다.”(39), “그 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41),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42)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본적이 없다. 다만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들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온 우주 만물의 구주로 알고 믿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도 예수께서 직접 자기 집에 “내려 오시라”고 말한다. 나사렛이나 가나는 산동네요 그가 사는 가버나움은 바닷가이기 때문에 내려오시라고 청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지 않으셨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때 아들이 살아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도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믿고 받아들였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들으려고 청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 고향 사람으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럽고, 그래서 영접하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용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고향 사람으로 영접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크게 다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씀을 받아야 할 고향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 기적을 원했다. 기적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하고, 구원의 방법,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에 대한 지식, 영적 성장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기적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는 기적은 단순한 도로의 표지판에 불과한 것이다. 도로 표지판은 나그네가 가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안내할 수 있지만, 그 성읍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일회성의 사건일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해주지 않는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기적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계속 기적을 바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선물을 사다주는 부모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게속 선물을 기다린다. 성장도 없고, 잘 못된 길로 가기 쉽다. 유치한 믿음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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