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최종목적- ‘공산 악령’ 3
2018/11/09 16:4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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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기간 잔인한 폭력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 이 글은 ‘대기원시보’가 편집 발표한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이 글 속의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을 일컫는 것이지만, 공산주의는 단순한 사상이나 학설이 아니라, 신을 부정하고 인류 문화를 파멸시키려는 ‘공산 악령’(紅魔)임을 강조하고 있다.                                           - 편집자 주- 

“중국공산당 어용학자들은 공자, 노자,
석가모니가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했고,
선현들을 세속화시키고 놀림감으로 삼았다”

3) 사상 개조는 무혈 살인
1950년대 말, 중국공산당은 일련의 사상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무훈전(武訓傳, 청나라 말기 동냥한 돈으로 학교를 세운 무훈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비판운동이 있었고, 량수밍(梁漱溟), 위핑보(兪平伯), 후스(胡適)와 후펑(胡風) 등을 비판했으며, 반우파 투쟁도 벌였다.
이전의 옌안(延安) 정풍이나 이후의 문화대혁명도 모두 대규모 사상 개조였으며, 정풍과 문화혁명에는 피의 살육이 동반됐다. 1950년대 사상운동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토지개혁, 삼반오반(三反五反), 진반(鎭反) 등 정치운동이 동시에 전개돼, 태도가 고분고분하지 못하거나 사상 개조를 거부하면 무서운 일을 당해야 했다.
중국공산당의 사상 개조에는 폭력과 강압이 동반됐다. 폭력은 심리적 공포 조성을 위해서였으며, 강압적 수단은 피해자가 개조의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독립적이고 불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공산당 정치운동에서 발버둥 치다 결국 굴복하거나 죽음을 맞이한 과정을 수없이 지켜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과정을 지켜봤던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인 핍박도 직접적인 신체 폭력을 겪은 사람들에 비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4) 인륜 대재앙, 전 국민이 피해자
문화혁명 기간에 자행된 잔인한 폭력은 평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간접적으로 학살된 영혼이 훨씬 더 많아 스탈린 대학살보다 해악이 컸다.
문화혁명의 특성은 전 국민이 참여해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자신이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사람들을 직접 죽이거나 굴락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 노역에 시달리다 죽게 했지만 사상 파괴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 당시 스탈린보다 더 잔인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죽여 피해자 규모도 더 컸다. 매번 비판 투쟁 대상은 소수였지만 사실 전 국민이 피해자였다. 게다가 비판 투쟁과 억압은 비밀경찰이나 하수인 등이 아닌 동료, 동창, 부하, 학생, 친구, 이웃이었고, 참여하지 않으면 계급의 적을 동정하고 입장이 불분명하다는 등 이유로 즉시 비판 대상이 됐다. 수시로 벌어지는 각종 모욕과 고문, 살육 등의 참극은 사회와 격리된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닌 캠퍼스, 교실, 일터, 동네, 각 기관이 자체 설립한 소위 ‘외양간’ 등 일상생활 환경 속에서 벌어졌고, 동기, 이웃, 학우, 사제, 친구, 형제자매, 부부, 부자 간에 서로 적발하고 비판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면 입장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가까운 사람을 심하게 대할수록 확고한 입장을 증명할 수 있었다.
1966년 12월, 마오쩌둥의 비서 후차오무(胡喬木)가 베이징 철강대학으로 끌려와 비판을 받았다. 당시 그의 딸은 무대에 올라가 자신의 아버지를 비판하며 “후차오무의 머리통을 깨부수자!”라고 외쳤다. 후차오무의 딸은 아버지의 머리를 정말 깨부수지는 않았지만 한 중학생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당시 동서 지역에 한 ‘자본가’ 노부부가 있었는데 홍위병은 그 노부부를 반죽음이 될 때까지 심하게 폭행하고 그 집 아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중학생이었던 노부부의 아들은 아령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때린 후 스스로도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미쳐버렸다.(<우리집: 우리 형 위뤄커(遇羅克)> 중)
이렇듯 전 국민이 비판 투쟁에 참여하면서 가족 윤리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전통 가치관은 중국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전통사회 가치관도 모두 사라졌다.
이 같은 비판 운동이 보편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각종 급진적 방법으로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인륜과 도덕에 위배될수록 중국공산당과 일치했고,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사회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됐다. 이는 전통문화 가치와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당(黨)문화’의 마당이 형성되게 했다.

3. ‘전통의 회복’은 소프트한 세뇌
수천 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 문화는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한 후 철저히 파괴됐다. 하지만 “산은 움직이지 않아도 물은 움직인다”는 말이 있듯이, 중국공산당은 오늘날 도리어 전통문화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 다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으로 국제무대에서 내세울 가치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들은 중국을 방문하면 명문대학에서 강연하며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보편적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미국 입국 즉시 ‘지하당원’이 되어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 그들은 미국 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종교는 아편’, 무신론 같은 소위 ‘선진문화’를 선전하지 못한다. 둘째, 정권 유지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세대들은 오히려 당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은 전통문화에서 화위귀(和爲貴, 조화가 귀하다) 같은 개별적인 개념을 꺼내 위기에 대처하려 했다. 셋째, 전통문화가 아직 중국인들의 뼛속 깊이 남아있기에 민간에서 문화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회복 있을 수 없어
전통 회복을 말하려면 우선 전통문화를 파괴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시의 각종 황당한 행위에 대한 반성, 청산, 폐기가 있어야만 진정한 회복을 논할 수 있다. 특히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전통 회복의 시발점에 설 수 있다. 신이 창조한 중국 전통문화는 반신(半神) 문화이며 보편적 가치다. 무신론을 끌어안고 신에 대한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문화와 궤를 같이할 수 있겠는가?
중국공산당 어용학자들은 공자, 노자, 심지어 석가모니가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했고, 공자의 <논어>가 중국공산당 통치 하에서 행복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으며, 성인들의 철학을 중국공산당 당대회 주제와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는 선현들을 세속화시키고 놀림감으로 삼는 것이 유행이 됐다. 또 민간에서 전통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뤄져도 중국공산당의 통제 하에서 이용만 당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출가한 종교인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그러나 중국 모 종교협회 회장은 ‘19차 당대회 정신’을 전달 받은 후 소감을 발표하며 “소위 말하는 구원이란 어려움에 처한 신도들을 돕고, 그들의 합법적 권익을 보호하며, 그들이 생산과 일, 생활에서 부딪힌 어려움과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종교가 공산당 치하의 임시 노조나 되는 것 같으며, 출가 종교인의 행위와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공산당은 전통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과 종교 대학에까지 공산당 지부를 세우고, 전통문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지도 작용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전통문화를 지도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면 전통문화 회복이란 부질없는 일이지 않은가?

2) 중국공산당이 회복시킨 유가문화는 물 떠난 물고기
인문(人文)의 시조로 추앙받는 헌원(軒轅) 황제는 5천년 전 도가(道家)를 수련했다. 도가 문화는 중국문화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반으로 중국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불가(佛家)나 도가보다는 무신론으로 생각되는 유가를 더욱 선호하며 큰 공을 들였다. 유가는 신이나 부처에 대한 신앙보다는 인간 세상의 이치에 초점을 맞췄지만 공자는 신을 믿는 시대에 살던 인물이며, 유가문화는 신성(神性)이 있는 환경에서 생겨나고 발전한 문화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선결조건으로 삼는다.
공자는 평생 주례(周禮)의 회복에 힘썼으며 주례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 그 이유를 자세히 따져보면 결국 신앙 문제로 귀결되는데, 신과 하늘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공자가 주례를 회복하고자 했던 배경에는 주나라 사람들의 종교 신앙이 있었다. 그들은 천제(天帝)가 천자(天子)를 지정하고, 천자는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고 상을 내리며, 국정을 주관하고 군사와 농업을 지휘한다고 믿었다. 공자 이후, 한(漢)나라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올려, 유명한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내세우며 황제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유가의 인정(仁政) 사상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명백히 밝혔다. 그의 이론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에 기반을 뒀다. 이처럼 유가는 결국 종교 신앙과 신성(神性) 문화에서 모든 근거를 찾았다.
하지만 무신론에서 말하는 ‘하늘(天)’은 어떤 하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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