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㉘ 장례 예식
2018/12/14 11:5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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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와 추모의식, ‘의례신학’ 정립이 우선되어야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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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보면 ‘천하 모든 것에 때와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사람이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했는데 매련한 인간들은 천년만년 살 것같이 행동한다.
진시황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더 오래 살기를 꿈꾸어 ‘100세 시대’가 보편화되었고, 지금은 ‘120세’를 노래한다. 그래도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문제의 탐색
사람이 죽으면 장례 예식이 뒤따른다. 그 사람의 배경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그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가 이 과정을 거친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후의 장례 예식이다. 이른바 ‘기독교식 장례’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식이 아닌 용어나 절차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예배 인도는 목사가 하지만 실제로는 장의사 직원이 주도하는 경우를 쉽게 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례의 탐구
‘기독교식’이라는 정해진 규범이 없고 전통적 방법에 예배라는 형식을 덧입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장례 모습이다. 한 목회자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상계청암교회의 이영욱 목사의 생각이다.
김남식(이하 김):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 별세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장례 예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 가정에 초상이 나면 부고를 전할 때에 “아무개가 소천하셨다”라고 알리는 경우가 많다. 거의 전부그 그렇게 하는 것같다. 조문인사차 장례식장에 가보면 각처에서 보내온 조화에도 달려있는 문구는 거의 모두 ‘소천’(召天)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른 표현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상가에 조문인사차 모여든 사람들의 대화 중에도 거의 모두 별세를 소천이라고 하며 얘기를 한다. “그 건강하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소천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별세라고 말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어떤가? 목사들도 대부분 별세를 소천이라고 말하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인도한다. 별세라는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김: 국어대사전을 보면 ‘소천’이라는 말이 없다. ‘소천’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다. 성경에는 ‘별세’라고 말한다. 누가 복음 9장 31절에 보면 변화산 위에서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성경에도 세상을 떠나는 것을 ‘소천’이라고 하지 않고 ‘별세’라고 했다.
이: 소천(召天)이 뭔가? 부를 소, 하늘 천이다. 이 말은 ‘하늘이 부른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을  부른다’는 뜻이다. 성경에 죽음에 관한 말씀이 허다하지만 죽음을 소천이라고 말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소천’이라는 말을 ‘하늘이 부른다’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다. ‘소천’이라는 말을 꼭 사용하고 싶으면 ‘소천 되셨다’라고 하면 되기는 되나 굳이 궁색하게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천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별세’라고 하면 성경적이고 사리에도 맞고 듣기도 좋은데 굳이 소천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김: 이와 못지않게 문제 되는 것은 추도예배 혹은 추모예배이다.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어떻게 드리게 됐을까? 한국교회와 문화를 50년 넘게 연구한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영국 셰필드대학교)는 ‘추도(추모)예배’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지만 ‘제사를 중심으로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나라에서는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한국이 그 모델이다.
이: 사람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고, 누구나 피해갈 수 없고 또 언젠가 한 번은 꼭 겪어야 하는 일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두려움, 무서움, 슬픔, 아쉬움 등이다. 왜? 그럴까?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이고,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해서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제사를 통해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 예식을 가진다. 성도들도 죽은 사람을 사모하기에 추도(추모)얘배로 모인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한자어인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슬퍼하는 것이고, 초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데에 있다. 반면에 ‘추모’(追慕)는 ‘추도’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고, 기억하는데 있다. 여기에 ‘예배’를 붙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추도(추모)예배’는 모두 다 죽은 사람을 기리고 애도하는 형태이다. 그래서 여기에 예배라는 단어는 붙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김: 역사적 흐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추도(추모)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조선 기독교인들이 추도(추모)예배를 제사 대신으로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회의록’에 추도(추모)예배를 다룬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부모 기일에 기독교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이웃을 불러 함께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헌의안이 올라왔다. 총회는 형식은 예배와 같으나 제사와 다르지 않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 192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추도예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성경은 성도가 죽은 자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들을 말하고 있다.
김: 기독교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하나의 규범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주목할 문서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에서 죽음과 관련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을 금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
② 죽은 자에 대한 예물 헌납도 금한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신 26:14).
③ 죽은 자에게 제사함을 브올의 바알을 숭배하는 죄라고 단언한다.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시 106:28)
④ 죽은 자를 기념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시 31:12)
⑤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를 저주하고 심판하실 것을 단언한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18. 20).
⑥ 우상 숭배적 종교기념일을 폐하라고 선언한다. 사람의 유전(유전), 절기, 월삭, 안식일, 천사숭배 따위는 조상이 전한 망령된 행실로서(벧전 1:18) 금지된 신앙의 기독교윤리이다.
이: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사회가 제사를 중심으로 한 가족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음은 인정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추도(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근거해 볼 때에 죽은 사람을 추도(추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 받아야 하는 예배가 죽은 사람과 관련된 예배용어로 사용하나는 것은 신앙적 큰 문제이다.
 
기본에의 회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장례 예식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연구하고 뜻을 모아야 한다. 특히 ‘추모’ 또는 ‘추도’예배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는 ‘추도(추모)예배’를 사용하기보다 예배와 추도(추모)를 분리해서 상용할 것을 제안한다. ‘추도(추모)날’에 온 가족이 모여 ‘가족(가정, 위로, 기념)예배’를 드린 후에 그 다음에 죽은 고인을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예배’를 드릴 때에는 죽은 고인들 언급하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은혜 그리고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나눈 후 잠시 고인을 추도(추모)하는 것으로 진행하면 정서상 큰 문제없이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정립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추도(추모)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이 정립되고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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