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대 목사 가정… 3대가 같은 교회시무
2019/02/14 14: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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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같은 교회를 시무한 대표적 목회자 가문
민족주의자 이만집 목사·독립운동가 이성해 목사·부흥사 이호문 목사·목회자 이선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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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목사를 배출한 복된 가정에 더 큰 복이 임하여 3대가 같은 교회를 시무한 가정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은총이다.
이만집-이성해-이호문-이선목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아름다운 계보는 역사적으로 조명할만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자취를 추적해 보자.

민족주의자 이만집 목사
1대 이만집 목사는 평생에 3.1독립 운동과 자치파 파동을 겪으며, 교단에서 제명되기도 하고, 세월이 흘러 복권되는 특이는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1875년, 경북 월성군 강동면 호명리에서 출생하였고,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안의와(Tames E. Adams)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고 경주에서 입신하였다.
1906년, 대구 계성학교의 창설교사로 부임한다. 교장 안의와, 교사 이만집, 학생 27명으로 시작된 이 학교는 기독교 사학 명문으로 알려진 계성중고등학교이다. 이만집은 이 학교에서 주로 한문과목을 가르쳤다.
1909년,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2년 장로 시무 사면을 하고 순회 조사로 부해리(H.M. Bruen) 선교사와 함께 경북 일원을 순회 전도를 하였다.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신학교 재학중인 1914년 말 대구에 남산교회를 설립하고 부해리 선교사와 동사하였다. 또 1917년에 평양신학교 제10회로 졸업하고 제2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그해 9월에 남산교회 위임목사가 된다.
다시 1918년, 대구 남성정교회 위임목사가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대구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발기로 교남기독청년회(현 대구 YMCA)를 조직하고 회장에 피선되었다.
이만집은 대구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보였다. 여기서 그의 삶의 급변이 일어난다.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였고, 3월 8일 대구 서문 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당한다.
1919년 4월, 대구 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 언도를 받았고,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3년 언도, 7월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3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다가 1921년 2월에 대구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이만집이 3년 징역을 받았는데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이 3년 언도를 받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만집의 영향력이 비록 지방에 있었지만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재판의 속전속결이다. 1심이 4월, 복심이 5월, 고등법원이 7월에 언도할 정도로 총독부는 대구 만세운동을 하나의 재판의 모델로 삼았다.
출옥한 이만집은 대구 남성정교회에 시무하다가 1921년 5월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후학을 발단으로 교회가 분규에 휘말리고 이것이 노회 문제가 되어 1923년 3월 18일 이만집 목사와 박영조 목사 등이 선교사들로부터의 자치를 선언하여 이른바 ‘자치파 파동’이 시작된다.
교회측과 선교사 중심의 노회측이 교회당 소유권 문제로 승소와 패소를 거듭하다가 1931년에 노회측의 승소로 예배당을 노회측에 인계한다.
이만집 목사의 자치측은 봉산교회를 설립했고, 1936년에는 장남 이광세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관을 세운다. 장안사 맞은 편에 30정보의 땅을 확보하고 3동의 건물을 세웠다. 이 수양관은 신사참배 강요를 피하여 온 성도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이만집은 1944년 7월 69세의 일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99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예장통합 경북노회에서 2005년에 복권시켰다.
여기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자치파 파동이 선교사와 대립하였기에 반미로 몰렸고, 일부 역사가들이 ‘친일파’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학술지인〈신학지남〉1985년 겨울호에 김남식의 논문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에서 ‘이만집은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라고 하여 기존 학설을 뒤엎었고, 친일파라고 한 학자의 사과까지 받았다.
김남식은 1987년에 〈이만집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저술하였고, 이것이 보훈처에서 인정되어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민음의 대를 이은 후대들
이만집의 장남은 이광세 목사이고, 차남은 이성해 목사이다. 이성해 목사에 대해서는 김남식이 “이성해 목사, 그 성자적 삶”이라는 전기에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이성해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체포되었다. 아버지 이만집 목사는 징역 3년, 17세의 아들 이성해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이성해는 일본 관서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귀국한 이성해는 아버지를 도와 금강산 수양관 건립에 참여한다.
이성해의 생애에서 획기적 사역이 시작된다. 그것은 철원기도원의 설립이다. 철원의 한탄강변에 기도원을 세웠고, 한국교회 영적운동의 모판이 되었다. 그 후 목회에 헌신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가족을 두고 홀로 남하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63년에 강릉에서 인천 숭의감리교회로 부임하였고, 1973년에 은퇴하여 후임으로 아들 이호문 목사를 세웠다.
이호문 목사는 1938년 경북 월성군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쳐 목사가 된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흥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적운동을 주도하고 숭의교회를 10만 성도의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의 타고난 열정은 한국교회 역사에 기억되어야 할 일이다. 목회와 부흥에 이어 인천여자신학교를 굴지의 신학교로 성장시켜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
4대 이선목 목사는 이호문 목사의 장남으로 목원대 신대원을 수료하고, 영국 유학을 한 후, 2008년에 아버지를 이어 숭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4대 목사 가정에서 3대가 같은 교회를 시무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서만 가능하다.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그 열정이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다. 필자는 이만집 목사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만집, 이성해 두 분의 전기를 집필한 바 있기에 그 가문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믿음들의 꽃을 피워 ‘4대 목사, 3대 같은 교회 목회’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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