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본 기사는 교계 인터넷 언론 아고라젠에 오른 축복의 산! 그리심산교회 그리고 기도원, 최하은 목사로 원작자의 제공으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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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좋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심산이란, 신명기 11;29절 말씀에 요단강 건너편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언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심산(855m)과 에발산(920m)은 가나안 중심부에 있는 산이다. 에발산은 일명 저주의 산이며 맞은편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이다.

그리심산 기도원, 기존에 자주 대하던 이름이 아니라서 그런지 뭐랄까, 이름에서부터 왠지 모를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본 잡지의 특성상 섣부르게 확인되지 않은 기도원과 여자 목사를 취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 518() 로마 카톨릭과의 신앙과 직제일치반대 5주년 한빛광장 집회 순서를 맡았던 그리심산교회·기도원 원장인 최하은 목사에게는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검증 아닌 검증이 필요한터라 그리심산을 찾았다. 먼저 주관적 입장에서의 질문을 찬찬히 메모를 했다. 때론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판단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질문을 하다 보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여러 형태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고, 기사 게재에 있어서 실수를 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적인 질문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지난 518일 집회로 최하은 목사는 WCC·WEA 반대운동연대(조직위원장/ 송춘길 목사)의 반대집회에 201810월과 지난 3월에 이어 3회째 연속 순서를 맡았다.

 

최하은 목사는 순서를 맡았던 두번의 반대 집회에서 한국교회를 향해 간결하고도 거침없는 목소리를 냈었다. 이는 마치 한국교회가 중세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는 작금의 한국교회 상황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회개를 선포하는 날카로운 경고의 호령처럼 들려졌다. 남자 못지않은 담대함과 열정은 그 안에 어떤 영적 배경이 감춰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게 했다.

 

한국교회 웬만한 남자 목사들보다 WCC·WEA 및 로마 카톨릭과의신앙과 직제일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지식과 일사각오 회개의 일침은 기대 이상의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여자 목사를 비하하는 일부 남자 목사도 수백 명이 모인 대중 앞에서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감히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데 속이 다 후련했다.

 

1년에 2~3회 있는 WCC·WEA 및 로마 카톨릭과의 신앙과 직제일치반대 집회를 준비할 때 가장 애를 먹는 것은 강사와 순서자 선정이다. 뭐가 그렇게 눈치가 보이고 두려운지, 설교는 고사하고 작은 순서 하나라도 부탁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지난 518신앙과 직제일치반대 5주년 집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집회를 주관하다 보면, 여자 목사를 연단에 세웠니 어쩌니 부터 내용이 직설적이고 너무 강하니 마니 하는 사람(목사)까지, 정작 하나님 앞에서 뭐가 중요한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낸다. 배도, 배교, 우상 숭배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자는 데 도대체 남녀 구별이 왜 필요한지 묻고 싶다.

 

정작 나서줘야 할 한국교회를 쥐락펴락 하는 수많은 남자 목사들은 어딘가에 정신들이 팔려(?)있는지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통 기독교회를 지키고 신앙의 적폐를 몰아내고 복음을 사수하자는데 전, 후방이 따로 어디 있는가.

 

주님께서 오죽 답답하시고 통분해 하셨으면, 정작 외쳐야 할 주체들이 이것, 저것 다 따져가며 도무지 외칠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저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못난 돌들을 일어나게 하셔서 WCC(종교다원주의), WEA(포용주의), 적그리스도 앞잡이인 신앙과 직제일치에서 한국교회가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주님의 간절한 심정을 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말로 인해 필자로서는 지난 518신앙과 직제일치반대집회 때 연단에 서야 하는 최하은 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검증할 수밖에 없었다. , 반대집회 연사로 잘못 초청하면 그동안 쌓아온 ‘WCC·WEA 반대운동연대의 정체성에 손상이 가게 되고, 그러면 애당초 연단에 세우지 아니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최하은 목사가 교회 사역만 전념하고 있다면 간단 한데, 주 사역이 기도원이다 보니 본인에게는 다소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신중을 기한 약간의 체크가 필요했다.

 

기도원과 교회를 동시에 사역하는 경우라 사뭇 조심스러웠다. 기자라고 해서 함부로 판단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혹 떠도는 무성한 말이 한 사람의 귀한 목회 사역에 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소리소문없이 몇 번 찾아가서 설교를 들어보고, 몇 번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대화도 진솔하게 나눠보고, 현장 스케치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줄거리(?) 파악은 되기 마련이다.

 

주일 11시 낮 예배와 평일 낮 집회 2회를 참석해 본 후 현장 스케치를 마치고 몇 시간에 걸쳐 필자 특유의 취재방식으로 대화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경우(?)의 답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챙겨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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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은 목사의 WCC·WEA, ‘신앙과 직제일치반대 열정

한국교회의 보수 교단이라고 자처하는 교단의 목사 중에서도 WCC·WEA , 로마 카톨릭과의신앙과 직제일치를 왜 반대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받아들이면 왜 안 되고 배척해야만 하는지 아직도 동문서답하는 목사들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 영적 심각성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성도들에게 주의를 필요로 하는 목사들도 있지만 말이다. 비록. 안다고 할지라도 교단과 어느 해당 소속감이라는 지독한 프레임에 갇혀 선뜻 나서지 못하는 목사가 다반사이다. 진리가 죽어서 실려 나가든, 몽둥이를 맞고 쫓겨나가든 관심들이 없다. 다만, 보장된 자리(?)와 주머니만 채워진다면 무엇이든 만사 오케이다.

 

취재 도중 안 사실이지만 최하은 목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WCC의 영적 해악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20131029일 제2의 신사참배인 10WCC 부산총회에 교회 성도들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가 반대운동에 참석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그날 새벽에 내려와 그곳에 모였던 수만 명의 참석자에게 WCC 반대 유니폼, 모자, 피켓 등을 교회 성도들과 일일이 나눠 주며 참석자들이 자리를 정돈하며 일사불란하게 앉을 수 있도록 자원봉사자의 몫까지 톡톡히 해냈다.

 

이런 열정이 있기까지는 일찍이 최 목사의 기도 중에 WCC가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을 성령께서 알게 하셨고 이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최 목사는 오랜 심사숙고 끝에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던 중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됐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한국교회 안에 똬리 틀고 앉아 달라붙어 있는 WCC·WEA, ‘신앙과 직제일치반대에 순교까지 감수하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나서기로 했다.

 

다름 아닌, WCC·WEA, ‘신앙과 직제일치반대를 위한 총회(교단)를 기도로 준비하며 창립한 것이다. 아울러 이를 뒷받침 하는 신학교도 설립했다. 현재, 거룩한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40여명의 목회자와 교회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신학생도 모집하어 훈련 중이다. 배도, 배교가 창궐한 이 시대에 실로 귀한 사역이 아닐 수 없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교회는 불행하게도 꿩(WCC·WEA, ‘신앙과 직제일치’) 잡을 매가 흔치 않다. 서로 정치적 여러 이해관계와 이권에 얽히고설키어 감히 매가 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영적으로 깨어 일어나 그 여건과 토양을 만들어주고 꿩 잡을 매로 힘(?)을 보태 주기만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서 사방에서 꿩 잡을 영적 매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다고 본다. 배도, 배교의 꿩 잡는 이 거룩한 운동에 하루속히 한국교회가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말고 함께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대교단? ·대형 교회? 한국교회 크고 작은 연합단체? 하나님 앞에서 과연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결국 배도, 배교자들과 2인 삼각 경기하듯이 얽히고설키어 요지부동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국교회의 한 모퉁이를 기억하고 계셨다. 저 사악한 꿩(WCC·WEA, ‘신앙과 직제일치’)의 날개를 꺾자는데 전 후방이 어디 있는가. 배도, 배교의 역사가 창궐한 이 마지막 때 그리심산 총회와 신학교, 최하은 목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지 아무도 모른다. 여자 목사가 나선다고 해서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주고 마지막 때 여 목사에 대한 기대와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명 대 교단의 목사들과 눈칫밥에 움츠리고 있는 중,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보면, 본인들의 비겁한 처지는 망각한 채 실소할 수는 있겠으나, 골리앗도 홍안의 소년 다윗의 물매 한 방에 고꾸라졌다. 그리심산 기도원과 교회가 불쏘시개가 되어 2013년과 14년에 한국교회에 불 일 듯이 일어났던 WCC·WEA, ‘신앙과 직제일치의 반대운동이 다시 한번 재현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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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은 목사의 세월에 빛나는 연단

지금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설 땅이 너무 좁다. 그런데 우리는 넓은 땅에서 마냥 길을 잃고 헤맨다. 입만 열면 초대교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입에 거품을 물지만 일단, 강단에서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씻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병든 신앙을 주님의 입맛에 맞게 과감하게 털어내지 않는다면 밖에 내어버림 받아야 할, 맛을 잃은 소금과 진배없다.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최하은 목사,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무장되어 지금의 강단에 서기까지 형언할 수 없는 매섭고도 혹독한 연단과 인내의 시간을 홀로 골방에서 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고, 그의 영적 기본기가 탄탄해지기까지, 강도 높은 연단의 길이가 얼마만큼이나 길었을까. 수천도 풀무 불 속을 수도 없이 들락거리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의 풀무질과 주님의 의의 도구로 제련되기 위해 닦고 조이고 씻어 내침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은 당하였을 것이다.

 

중요한 부분에 수없이 밑줄 치듯 연단의 시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 속에서 닳도록 밑줄 친 부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스도인의 진정 한 맛과 향기를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천금 같은 타작을 당했을 것이며, 타인에게 복음이 되고, 삶의 유익이 되고 생수가 되고, 영혼의 보약으로 쓰임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담금질과 연마의 피눈물을 쏟았을까.

 

비록, 보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혼자만이 남은 광야에서라도 요동침이 없이 제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인고의 훈련이었을 것이다.

 

몇 번의 최하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몇 번의 인터뷰 속에서, 특히 하나님께서 여자 은사자들에게 주시는 그 은사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거룩한 노동을 위한 눈물의 호미질 속에 먼저, 그에게 켜켜이 쌓여있던 잡초와 같은 쓴 뿌리를 뽑아가며 새롭게 돋아나는 거듭남의, 새살 심어 짜기를 주님의 시간이 될 때까지 두줄, 세줄 엮어 내기를 얼마나 많이 했을지.

 

건물로 치자면 한 시대에 쓰임을 다한 건물이 어느 날 여행자들의 맛집으로 새롭게 태어나듯이 하나님께서 최하은 목사를 그렇게 쓰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공부에 수없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회초리를 맞아가며 신앙과 인격의 담금질을 당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최하은 목사로 거듭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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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원 입구의 신선한 충격

지난 518신앙과 직제일치’ 5주년 반대 집회 전에 두 번째로 그리심산기도원을 찾았다. 최 목사의 설교를 다시 한번 더 들어보고 기도원마다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느껴(체크)보기 위해서였다. 평일임에도 100여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맨 뒤 자리에 예배 참석자인 양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녹음기와 노트를 펼치고 단어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썼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만큼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필자의 우려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27여년 가까이 교계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볼거 안볼거 없이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생쇼를 벌이며 헌금 강요는 기본 메뉴이고, 갈취는 물론, 거짓 예언, 감언이설, 혹은 겁박까지 하는 기도원도 섭렵했다. 기도원마다 웃지 못 할 헤프닝도 참 많이 봐왔다. 무당 굿거리 하듯 하는 기도원도 있었고 원장의 설교가 정말 민망한 곳도 있었다.

 

그리심산기도원의 예배 분위기와 최하은 목사의 군더더기 없는, 성경에서 성경으로의 선과 맥을 짚으며 누구나 이해하고 쉽게 들을 수 있는 설교는 생각지 못했던 정갈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수없이 봐 왔던 기도원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그에 상응하는 원장들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와 설교였다. 우리가 소위 생각하는 은사자의 요란한 제스처도 없었다. 518일 행사 전에 참석했던 3(주일 오전 11시 예배, 평일 기도원 예배 참석 2)의 급습(?)에도 그 모습, 그 분위기 그대로였다.

 

518WCC WEA ‘신앙과 직제일치반대 집회행사도 끝났지만 본 잡지 인쇄 들어가기 전에 모든 것이 만사불여萬事不如 튼튼이라고 오전 주일예배에 한 번 더 소리, 소문 없이 급습(?)하여 맨 뒤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필자 나름대로 기획 기사 한 편을 쓰기 위해 주일 오전 11시 예배 2, 평일 예배 2회를 드린 셈이다. 그뿐만 아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예배 참석 후 반드시 시간을 내서 묻고 지나갔다. WCC ·WEA 반대운동연대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크리스천 언론협회와 아고라젠 잡지의 명예가 사실상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글이란 일단 종이 위에 인쇄되고 나면 빼도 박도 못 하기 때문이다.

 

예배 마치고 나오다 현관에 붙어있는 후원계좌를 보고 의아해서 물어봤다. 본 기도원의 후원요청계좌도 아니었다. 그리심산기도원,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후원을 요청하는 선교단체 등의 후원계좌를 적은 프린트물을 코팅해서 일정 기간 정문 앞에 붙여 놓는다고 한다. 물론 주일예배 시간이나 평일 기도원 예배 광고 시간을 통하여 취지 설명을 자세히 한 후 성도들에게 해당 후원계좌에 감동되는 대로 눈치 보지 말고 후원하라고 광고를 한다. 물론 검증되고 확인이 된 곳을 기준으로 한다.

 

정말 보기드문 풍경이다. 어느 교회, 기도원, 선교단체든 성도들이 다른 곳으로 헌금을 할까 봐 알게 모르게 경계가 심한데 그리심산은 아예 오픈시켜 놓고 있다.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산의 이름에 걸맞은 기도원, 교회라서 그럴까.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상에 불러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왕국, 이 땅의 정의와 옳고 그름이 아닌 아닌 하늘의 공의와 사랑의 규칙에 의해 통치되고 다스려지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

아무리 아름다운 글이나 멋있는 기사라 할지라도 기자의 올바른 정신이 없다면 그 글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리심산기도원, 교회 주일예배 2회 급습(참석) 1회는 더 객관성을 가지기 위해 언론밥 베테랑 기자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 사실 이단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가 무엇이관데 예배와 설교에 관하여 가타부타 말할 자격이 없다. 사실 급습이니, 뭐니 하는 표현도 죄송할 뿐이다.

 

그러나, 이단이라면 낱낱이 파헤쳐서라도 마땅히 한국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줘야 하고, 이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도원이라는 특성과 또한 여성 목사라는 것 때문에, 원치 않는 오해 등으로 마녀 사냥식의 피해를 본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언론이 나서서 막아줘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다고 본다. 이는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필자는 무당 굿거리 하는 식의 기도원들도 다녀 봤지만 건전한 기도원들도 상당수 다녀 봤다. 공통점은 기도원이 건전하지만 부흥하기 시작하면 주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없는 소문까지 만들어 퍼트릴 때도 있다. 교인 쟁탈전이 치열하다. 반대로 기도원에 열심히 다니며 은혜를 받던 교인들이 돌연 문제를 일으키고 기도원을 나가서는 별의별 음해를 다 하고 다니기도 한다.

 

문제 발단의 원인은 주로 금전 관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도원에 다니면서 친해지기 시작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린다. 그뿐만 아니다.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 알게 모르게 분란도 일으킨다. 어떤 때는 네 편, 내 편, 편 가르기도 한다. 결국엔 입지가 좁아지면 기도원을 나간다.

 

그런 사람은 나가서도 절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나가서는 온갖 험담을 다하고 다닌다. 여기저기 전화로 이간질도 시킨다.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갈아먹기 시작하는 쥐와 같은 도구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변해간다.

 

이런 일들은 기도원뿐만이 아니라 일반교회에서도 흔하게 발생하는 일들이다. 다만, 기도원이라는 특성 때문이랄까, 그 특성 때문에 별거 아닌 문제가 사건이 되기도 하고 이슈 아닌 이슈가 되기도 하는 억울함을 겪기도 한다. 개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긴 불똥이 기도원으로 튄다.

 

이러다 보면 자칫, 문제의 발단은 확인도 안 해보고 부화 내동하는 언론도 생긴다.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현장 스케치와 반론 보도를 깡그리 생략한다.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제보자의 입맛과 언론사의 이슈 몰이를 위한 잣대에만 맞춰서 한편의 그럴듯한 소설을 쓴다. 순진한 독자는 그런 줄 알고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런 경우 기자의 정확한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보자와 기자의 개념으로만 세워진 토대의 건전성 여부이다. 진실과 사실이란 토대 위에 세워진 개념은 선한 것이지만 허구나 억지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개념은 악한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그릇된 토대를 근거로 하여 한쪽으로만 무게 중심이 경도될 수밖에 없는 기사는 진실과는 정반대되는 허구를 진실로 미화할 수밖에 없다. 이는 취재 현장을 스케치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과 취재처에 대한 사전지식, 영감(영적 감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경도된 기사는 대단한 문제점을 내포(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직도 제보자와 기자 사이의 탁상공론식 대화가 기사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더욱이 기도원 취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거기에 교회까지 겸하고 있다면 말이다. 현장 취재기자 자체가 주, 객관적으로 느끼고 헤아릴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신앙과 기도의 연륜, 영감, 혜안 등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여기에 신학적 지식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십여 년이 넘게 교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얻은 지혜는 우리가 쉽게 표현하는 나쁜 기도원이든, 좋은 기도원이든 취재기자의 꾸준한 영적인 생활과 체험적인 영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때가 있다.

 

의욕만 가지고 달려들 일이 아니다. 지면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차지하고 섣부른 제보에 혹하지 말라는 것과 한 건 했다는 식의 어리석은 모양은 자제하라는 것이다. 그런 내면의 성벽을 깨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글이나 멋있는 기사도 올바른 정신이 없다면 이미 죽은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을 가로서서 막는 마귀 대리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고라젠 발행인 고정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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