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1대 박손혁·치덕·정덕, 2대 재영, 3대 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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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과 순결한 신앙을 강조하는 예장고신측의 초창기부터 뿌리가 된 가문이 있다. 고려신학교 교수와 목회자로 헌신한 박손혁 목사, 목회자요 성경연구의 달인인 박치덕, 박정덕 목사의 가문이다. 박손혁, 박치덕 목사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박정덕 목사는 성경연구의 대가였다.
이들 가정의 이야기를 3대 목사 가정인 박손혁 목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신앙의 깊은 뿌리
박손혁은 1901년 7월 13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외산리 351번지에서 박수민(朴秀敏) 장로와 김선이(金善伊) 집사 사이의 10남매(셋은 유아기에 사망하였으므로 사실은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친 박수민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부농(富農)이었으므로 박손혁은 어렵지 않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밀양의 마산리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는 박건선, 박윤선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회당을 지나다 예배에 참석한 것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향리 밀양에서 어린 시절을 어렵게 소학교과정을 마친 박손혁은 다소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뒤늦게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 교육은 비록 미미했으나 배재에서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였고 특히 영어실력이 탁월하였다. 그는 재학 중 전국영어 웅변대회에 출전하여 1등 할 만큼 외국어에 재능이 많았다. 배재고보에서 5년간의 과정을 이수한 그는 나이 30세 때인 1929년 3월 2일에 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교육의 여정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9년 4월부터 193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마산창신(昌信)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창신학교는 1909년 8월 19일 이 지역 출신 선각자인 이승규(李承圭)의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슨(A. Adamson, 孫安路)에 의해 설립된 선교학교였다. 이승규는 노산 이은상의 선친으로 마산지방 초기 신자였다.
이 학교는 4년재 보통학교로서 남녀공학제를 채택하였고, 1911년 8월 19일에는 고등과를 병설하였는데 후일 마산지역 청소년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주선교사 리알(D. M. Lyall, 羅大闢), 메크레(F. J. L. Macrae, 孟皓恩) 등이 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박손혁은 학교 교사로 일하는 동안 신학과 목회에 대한 소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를 위해 삶을 헌신하기로 한 이상 교사로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교사가 존경받는 직업이었고 비교적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으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기로 하고 1934년 3월 학교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신학교 입학과 함께 그는 호주장로회 선교를 소속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호주선교부의 관할지역인 경남지방의 교회를 돕게 되었다(1934. 4-1937. 3). 그가 호주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 교사로 일한 것 때문에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때도 호주선교부가 그를 후원하였고, 그로 하여금 호주선교부 관할하의 교회를 돌보도록 배려하였다. 즉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생으로, 그리고 호주선교부가 관할하고 있는 경남지방 교회의 순회전도사로 1937년 3월 31일까지 3년간 봉사하였다. 지역교회를 맡아 사역하면서 평양신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한 박손혁은 1938년 3월 16일 평양신학교를 제33회로 졸업하였다. 그와 함께 졸업한 이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강신명, 계일승, 김양선, 박성겸, 손양원, 한정교 등이 있는데, 특히 손양원과는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박손혁의 선친인 박수민 장로는 한상동 목사가 잠시 봉사했던 밀양 마산(馬山)교회에서 함께 교회를 섬기면서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밀양경찰서에 끄려가 매를 맞고 곤욕을 당하였다. 유치장에 구금되는 등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밀양을 떠나 있던 박손혁은 그렇지 못했다. 이 일을 그는 두고두고 마음 아프게 여겼다고 한다.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던 그가 해방 후 한상동, 주남선을 비롯한 저항인사들의 진리운동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해방 후 진리운동은 출옥 성도들의 완고한 혹은 독선적인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일제하에서 신사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교회 쇄신을 위해서는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947년 9월까지 6년 9개월간 함안 역전교회에서 시무한 박손혁은 1947년 9월 6일에는 밀양읍교회로 이동하여 1949년 9월 30일까지 2년간 위임목사로 봉사하였다. 1949년에는 부산 제일영도교회의 청빙을 받고 10월 1일 이동하였다.

고려신학교에서의 봉사
그가 부산 제일영도교회로 부임한 일은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부산으로 이거해 오자 1950년 첫 학기부터 고려신학교 강사로 초청을 받고 헬라어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것 외에 학교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특히 영어와 헬라어가 탁월하였고, 해박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약 4년간 강사로 고려신학교 교육에 동참했던 그는 1954년 4월 1일부터는 고려신학교 전임교수로 부임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박형룡, 박윤선, 한부선 등의 설립 당시의 교수들에 이어 제2기 교수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주로 신약언어와 성경, 신약석의(新約釋義) 등의 과목을 교수하였다.
해방 후 박손혁 목사는 기독교서회 총무였던 김춘배 목사의 부탁으로 찰스 어드만(Charles R. Erdman)의 주석 중 『마태복음』(An Exposition of the Gospel of Matthew)을 번역하기도 했다.

고신교회(단)를 위한 헌신
박손혁은 제일영도교회 담임목사로서 그리고 고려신학교 교수로서의 봉사 외에도 교단을 위해서 다양하게 봉사하였다. 1952년 9월 9일에는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57년 9월 6일에는 부산노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또 1958년 9월 23일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총회에서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 총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다시 1959년 3월 3일에 부산노회장으로 피임되었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교단의 해외 교회와의 친선관계, 곧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기독교개혁교회(CRC; Christian Reformed Church)와의 유대와 교류에 기여하였다. 1956년 4월에는 교단 총회 헌법수정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단의 조직을 정비하고 체계화 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조직된 경남 구제위원회 서기로 일하면서 오늘의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의 설립에도 적극 간여하였다.
목회자로서, 고려신학교 교수로 교단의 임원으로 봉사의 생애를 살아온 박손혁은 1965년부터 신장염 및 고혈압으로 투병하던 중 1968년 9월 8일 6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려신학교 교수로서의 봉사는 그다지 길지 못했으나 그의 온화한 성품, 겸손한 태도, 주의 나라를 위한 열정은 고려신학교의 역사 속에 지울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소중하게 남아있다.
박 목사는 1951년부터 16년간 고려신학교의 운영과 교수에 관여했다. 그는 고려신학교의 이사로(1951-1959) 출발하여 교수로(1954- 1967), 혹은 교장(1961-1962)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서울 배제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것 외의 공식적인 교육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능력이나 실력, 그리스도인다운 인품에 있어서 교수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고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오병세 박사는 박손혁 교수는 “한마디로 말해서 재사(才士)였다”고 회고하였다.
사려 깊은 목회자이기도 했던 그는 창원의 본포교회, 갈전교회, 함안 역전교회, 밀양의 밀양읍교회를 거쳐 1949년에는 부산의 제일영도교회로 부임하여 1968년까지 19년 동안 봉사했고, 이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일하던 때인 1954년부터 13년간은 고려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박손혁 목사는 한상동, 박윤선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나 사실 그는 한상동 목사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고, 한상동 목사의 브레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상동 목사와 동갑으로 연령적으로 주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으나 언제나 중심에 서고자 하지 않았고, 항상 뒤에서, 그리고 숨은 곳에서 일하고자 했던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2대 박재영, 대를 이은 목회자의 길
박손혁 목사의 장남 재영은 고신측 학생신앙운동(SFC)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였고, 미국 유학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뉴저지한인제일장로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고신미주총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고신의 ‘진리운동’을 미국에서 펼쳤다. 지금은 원로목사로 은퇴하여 한국에 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의 고신운동의 산 역사이다.

3대 박재철 목사
3대 박재철 목사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현재 NASA한인장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기적적 치유로 완쾌하여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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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신 교회쇄신 운동정신’을 계승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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