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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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역사상 한글 최초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생활을 한 섬을 탐사하기로 했다. 그간 일반여행과 산행 등으로 남해를 여러 차례 가보았으면서도 유배문학의 산실인 노도櫓島에 들리지 못한 게 남해에 대한 나의 숙제였다. 이에 기독언론계 지인들과 함께 지난 8월 초순  남해안일대로 역사문학기행을 하자는 뜻을 모아 길을 떠났다.
통영과 삼천포를 거쳐, 남해에 들어서면서 초입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마을 냉천을 먼저 찾았다. 이곳은 오늘 우리를 가이드 할 K의 고향이기에 잠간 들려보기로 했다. 잘 단장된 방파제를 둘러보고 선창가 팔각정에 올라 갯바람을 쏘이면서 오늘 탐사할 중요한 곳은 우리 중 아무도 가보지 못한 작은 섬이었다.
물금 독일마을과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금산아래 펼쳐진 상주해수욕장를 거친다. 오늘의 목적지 남해군 일동면에 딸린 삿갓모양으로 생겼다는 노도를 찾아가다가 잠시 쉴만한 곳에 들였다. 다들 음료수 캔을 사들고 그늘진 쉼터에서 잠시 쉬려는 중에 나는 왼손을 기둥에 댔다가 틈새의 무엇에게 꽉 물렸다. 따끔하게 아픔이 느껴져 살펴보니 7~8센티 정도의 지네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모처럼의 중요한 행선을 훼방하려드는 사탄의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사정없이 처치하는데, 지인들은 독성이 강한 지네에게 물렸으니 우선 병원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정도 쯤이야 라는 각오로 독기를 입으로 빨아내면서 선착장으로 향했다. 섭씨 36도까지 오르내리는 폭염으로 통증이 가해지고 있지만 팔을 못 쓰거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여겨져 강행하여 해변에 도착했다. 남해군 상주면의 짙고 푸른 연꽃이라는 벽련碧蓮포구다. 그 옛날 한 어부가 남몰래 김만중에게 고기를 잡아 공궤하는 중에 ‘구운몽’을 밖으로 반출해냈다고 하는 노도를 바라보고 있는 한적한 곳이다. 어떻게 생겨진 내력인지는 몰라도 불교에서 전해지는 대로 3천년 만에 한번 핀다는 상상의 꽃 우담바라의 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하루에 네 번만 운항하고, 기상이 나쁠 때와 매월 둘째, 넷째 수요일은 휴항이라는 것이다. 식당이 보여 점심을 사먹을 가 했는데 배가 금방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기상이 좋아 기분 좋게 찰랑거리는 파도를 가르며 얼마간을 항해하더니 금방 파도를 막아내는 거대한 삼각형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방파제 안 선착장에 배가 닿는다. 우리들 눈앞에는 작은 섬에 비해 유별하게 들어선 '노도 문학의 섬'이라는 대형조형물이 서있고 그 안에는 김만중으로 표현되는 옛사람이 조각되어 있어 호기심을 자아낸다.
섬 전체가 아홉 가구에 열여덟 명이 산다는 섬마을은 날씨 탓에 사람의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돌아갈 배 시간을 염두에 두고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한 장소와 그의 묘지를 찾아보는 게 기획된 미션이다. 더욱이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간악한 장희빈을 왕비로 세운 것에 대하여 중국고사를 빗대어 '사씨남정기'를 쓴 곳이다. 대사헌까지 지낸 분이 56년 생애를 마감한 곳이어서 외롭고 고단했던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초입에서 '서포 김만중 선생 유허비'를 먼저 대하고 마을로 곧장 들어갔다. 목도 마르고 시장기가 들었지만 기대했던 가게는 없고 간식과 물병은 건너편 승용차에 두고 온 터였다. 자초하여 극기훈련에 돌입한 셈치고 탐방을 계속하는데 가도가도 이정표나 표식이 없고 근간에 짓고 있는 걸로 보이는 펜션 몇 채뿐이다. 다들 무더위에 허기와 갈증으로 지쳐 마을로 돌아와 무화과 몇 개를 따먹으며 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현재도 등산가인 내가 선도하여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행선을 잡고 나아갔다. 한참을 헤매며 걷다가 묘지와 초옥 터에 이어서 우물지가 있다는 이정표를 발견했다. 두 갈래 길에서 먼저 산위 쪽으로 곧장 올라 묘지를 찾았는데, 김만중의 유해는 어머니 파평 윤 씨의 고향 파주 장단으로 이장해가고 빈터에 비석만 세워져 있는 허묘였다.
비지땀으로 멱을 감으면서 아래로 내려와 초옥 터와 우물지가 있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서포 김만중 문학관’을 신축하고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 문학관이 세워지면 역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겠지만 찾아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장의 교통은 불편하지만 작은 섬 깊은 한쪽에 세워지고 있는 2층 규모의 갈색 석조 건물이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어, 요즘 문학인들을 배출한 곳이 유명관광지로 뜨고 있는데 이곳도 한몫을 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문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곳이 될 것이기에 주변을 살펴보다가 김만중 선생이 직접 파서 사용했다는 우물터를 발견했다. 유일하게 보존되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웬 바닷게 몇 마리가 경계병들인 양 큰 집게발을 쳐들고 덤벼들 자세다.
어렵사리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지네 물린 데도 탈이 없을 것 같고, 난제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 같은 성취감에 젖는다. 선창가로 달려가 곧 떠나려하는 배에 올라 섬을 떠나면서 문학의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노도를 알리는데 힘을 쓰고 싶어진다. 그리고 완성된 문학관을 견학하고, 무화과로 허기를 면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이 섬에 다시 와 보아야겠다는 마음이다.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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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섬 노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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