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중세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린 ‘왈도파’ 및 ‘알비파’도 개혁파 일원

개혁파 교회
(Reformed Church
)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스위스 취리히에는 그로스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쯔빙글리가 개혁노선에 가담했다. 취리히는 제네바와 달리 독일어권 주민들이 모여사는 지역으로 루터의 개혁사업을 계승한 지역이다.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혁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독일을 중심한 루터와 멜랑히톤이 이끈 ‘루터파’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스위스를 중심한 쯔빙글리와 칼빈이 이끈 ‘개혁파’운동이다.
 
개혁파의 태두 쯔빙글리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훌트라이히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자신의 개혁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군과 두 차례에 걸쳐 전쟁도 불사한 진정한 개혁자였다. 그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발트하우스에서 7명의 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고, 어머니는 사제의 누나였으며, 삼촌은 가톨릭교회의 참사회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님과 삼촌으로부터 로마교회의 가톨릭교육을 받았다.
10살 때 바젤의 라틴어학당에서 라틴어 문법과 음악과 변증법 등을 배우고, 14살 되던 해에 베른대학에 진학했다가 다시 빈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고, 바젤로 돌아와 성 마르티누스학당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며 고전학을 연구하여 1506년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목사로 취임
쯔빙글리는 1518년 12월 11일 취리히의 대표적 교회인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독일계 스위스 종교개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519년 초부터 마태복음 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절 한 절을 살펴봄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천년을 넘는 동안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으나,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그리스어 성경을 앞에 놓고 회중들에게 그것을 설명함으로써 회중의 흥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해 취리히에는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시민의 3분의 1이 죽고, 그의 동생도 죽었으며, 쯔빙글리 자신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그가 기사회생하여 목숨을 건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덤으로써의 삶을 새로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고 믿었다. 그는 이 때부터 기독교신앙의 보다 깊은 차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1522년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와 혼인하고,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며 교회 안의 모든 형상과 십자가 등을 철거했다. 심지어 그는 교회의 오르간도 치워버렸다.

쯔빙글리의 67개 조항과 논쟁
1523 년 초 쯔빙글리는 67개 조의 논제를 걸고 가톨릭측에 논쟁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교황의 지상권, 미사, 성자 숭배, 인간의 선행과 효력, 금식, 순례, 성직자 독신제, 연옥 등의 비성경적인 계율들을 거부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가톨릭측과 개혁측의 제1차 논쟁은 1523년 1월 29일, 시청에서 성직자와 대소 의회의 의원 등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논쟁 결과 시당국은 쯔빙글리의 주장에 찬성하고 모든 설교자들에게 “신성한 복음과 거룩한 성경에 의거하여 확증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설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제2차 논쟁도 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 26일부터 시청에서 사흘간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350명의 성직자들과 10명의 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 미사와 성상숭배의 폐지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의회는 미사와 성상을 즉각 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제3차 논쟁은 1524년 1월 20일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교황주의자들은 세련된 우상숭배자들이고, 우상숭배야 말로 교회의 오류와 부패의 뿌리라고 거듭 비판하며,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의식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미사 옹호론자들은 논박을 당했다. 시의회는 자기들이 믿는 바를 고수할 수는 있으나 행정당국의 결정에 더 이상 저항하지는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1524년 6월 미사는 폐지되고, 개혁파 예식에 따른 복음설교와 성찬예배가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1525년에 종결되었다.
쯔빙글리는 가톨릭군과 벌인 제2차 카펠전투에서  47세의 나이로 그의 의붓 아들 게롤트와 그의 사위 그리고 동서와 함께 전사했다. 카펠은 취리히 호수 건너편 지역을 일컫는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의 개혁정신은 그의 제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 의해 계승되었다.

개혁파의 성찬
종교개혁에서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끝내 합의 보지 못한 것이 성찬이다.
개혁파 최초의 성찬식은 1525년 4월 고난주간에 그로스민스터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성찬 예식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엄숙하였다. 참례자들은 본래 제단이 있던 자리에 놓인 기다란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남자들은 오른쪽에, 여자들은 왼쪽에 자리하였다. 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와 말씀과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설교는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신다고 가르치는 요한복음 6장의 신비로운 말씀을 본문으로 하였다. 회중들은 무릎을 꿇은 채로 접시와 컵에 담긴 신성한 상징물들을 받았다. 예배 전체가 쯔빙글리의 이론에 따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고 그와의 영적인 교제를 행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미사를 폐지함으로서 떡과 잔, 두 종류의 성찬을 나누는 데는 일치했으나, 성찬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임재와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실제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이 부닥쳤다.
쟁점은 성찬의 성물들이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라는 자연적인 요소들에 육체로 임재하시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임재하시는가 하는 문제였다. 또한 그리스도를 모든 참석자들이 입으로 받는가, 아니면 믿음을 통해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받는가 하는 문제였다.
성찬 논쟁은 첫째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논쟁이었고, 둘째는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의 논쟁이었다. 성찬의 실재적 임재를 주장한 루터는 성찬상징론자들을 향해 “쯔빙글리파와 포도주만 마시느니, 차라리 교황파와 피만 마시는 쪽을 택하겠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친구 목사 프로브스트(Probst)에게 “복있는 사람은 성찬상징론자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쯔빙글리파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취리히 사람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와 칼빈파는 성찬에 대해 각기 견해를 달리했다. 첫째, 루터파는 성찬에서 성별의 기도 후에도 그 떡과 포도주는 주의 살과 피로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그 떡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실재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는다. 이를 공재설(共在說)이라 한다.
이에 반해 쯔빙글리파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며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상징설(象徵說)이라 한다.
또 칼빈은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다. 즉 떡과 포도주는 변하지 않지만, 성찬의 기도 후에 성령께서 그 떡과 잔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공로와 능력을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이를 영적임재설(靈的臨在說)이라 한다.
이후 칼빈의 주장이 개혁파의 성찬론을 대변하게 되었다. 개혁파의 성찬식은 일년에 네 차례 행해졌다. 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철, 그리고 성탄절에 거행되었다. 성찬식이 거행되기 전에 전교회가 이를 준비하는 경건한 시간을 가지게 함으로써 특별히 엄숙함을 갖추도록 하였다.

개혁파 교회들
개혁파(Reformed Church, 改革派)란 말은 광의로는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총칭으로서 사용되지만, 정확하게는 루터파에 대해서 쯔빙글리와 칼뱅파의 교회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된 개혁파의 신앙의 뿌리는 루터가 아니라 12세기의 왈도파와 알비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후 칼빈과 불링거에 의해서 쯔빙글리파와 칼빈파의 통합이 행하여지고, 주로 제네바가 거점이 되어서 1550년대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남폴란드, 헝가리 등에 침투했다. 12세기 월드의 물결을 일으킨 북이탈리아의 월드파는 1532년부터 개혁파에 합류했다. 정식으로는 “신의 말씀에 따라서 개혁된 교회”인데, 이를 “개혁된 교회”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는 신앙내용과 교회제도가 개혁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회중에서 선발된 ‘장로’와 개교회에 청빙된 ‘목사’의 회의가 치리권을 가져 한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는다. 즉 장로회주의 대의제도(代議制度)를 가진 교회를 통칭한다. 1877년 ‘세계개혁파교회연맹’(WARC)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중세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모진 박해를 받았던 왈도파와 알비파도 회원교단으로 가입해 있다. 또 1970년에는 회중교회(조합파) 세계연맹과 병합했다. WARC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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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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