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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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중세 교회에서의 논쟁 중 하나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였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3세기의 성 씨프리아누스이다. 이 말의 뜻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이름이나 방법과 수단의 구원의 통로는 없다는 말이고, 당시의 가톨릭교회 외의 구원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시작이고 머리가 되시는 역사적 예수의 출생은 서구의 땅이 아니라 중동 지역 다시 말하면 오리엔탈 문화권의 동방지역 베들레헴이다.(떡집. 한문으로는 병점이다.) 중세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천년의 세월 서구 유럽 세계는 온전히 가톨릭교회의 세계 안에 갇혀 있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베들레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지역은 소위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 3대 종교의 발상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3대 종교는 그때로부터 21세기 지금까지 서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원수의 관계로 지내고 있다. 한 아버지 밑에서 난 자식들이 여전이 으르렁 거리며 분쟁과 싸움과 전쟁을 일삼고 있다.
인류의 전쟁 유발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중 제일이 소위 종교적 신념이나 신앙의 근거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과 교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배타성을 강하고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 위에 소위 성전(Holy war)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물론 이슬람 역시 그렇고 유대교 역시 이러한 자기 신앙의 중심에서 서 있다. 불교는 이와 사뭇 다른 길을 주장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의 식민지의 명분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기독교의 성전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고 유럽의 반유대주의에 근거한 히틀러의 살인적 광기의 역사 역시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교회가 말하는 ‘거듭남과 중생, 다시 남, 새로운 사람, 새 생명,’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프란시스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탁발승이 되었다. 그가 노래한 평화의 노래는 지금도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기도가 된다. 그는 노래한다. 우리가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며, 사랑과 화목을 심으며, 절망 가운데 소망을 심고, 주는 자의 복을 바라며, 자기를 부인하여(버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를 기도 한다. 위로 받기보다 먼저 타인을 위로 하는 자가 되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평화의 도구가 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새로 거듭난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화평과 화목, 평화를 이루는 자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단지 사후 세계의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단을 막지도 못하였고 분단을 치유하려는 노력보다는 분단의 이념에 편승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려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교회는 버려졌고 남한의 교회는 자본주의와 불의한 권력들에게 공생과 기생을 하며 살아 왔음을 변명할 길이 없다.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의 시계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아직도 미국의 외세에 묶여 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본의 신 군구주의가 웅크리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중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과 세계적 이해관계의 틈바구니에 있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 갇혀 있는 평화인가? 교회 밖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교회 안은 과연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실천하며 교회가 가연 평화의 도구로써 존재하는가? 평화는 강력한 무력의 힘과 살생의 무기에서 오지 않는다. 정말 평화를 입증하려면 지구상의 핵무기 뿐 아니라 모든 촉력을 중단하고 살인적 무기들을 폐기하며 내 몸처럼 타인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로써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교회의 담과 벽을 헐어 버리고 평화의 도구가 되어 평화를 실천하는 평화를 만드는 개인과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자기 안의 울타리에 갇혀서 구원의 교리로 밥벌이에 연연하면 다시금 개혁이 아니라 진정한 역사의 혁명적 세력에 맞서게 될 것이다. 교회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역사, 사람과 자연 앞에서 정직을 회복하고 진정한 평화의 도구가 되어라. 오늘 우리는 남북의 평화 프로세스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을 목격하고 있다. 일본 아베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경제적 보복과 미중의 패권 싸움과 무역전쟁 등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할 시점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들이 진정으로 겸손을 실천하며 이러한 한반도의 분단 극복의 평화를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존재의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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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밖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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