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1대 엄주신, 2대 엄영환, 3대 엄동규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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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엄주신 장로
엄주신(嚴柱信, 1890-1973)은 1890년 4월 15일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에서 엄순업(嚴順業)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그는 유가적(儒家的) 전통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19세가 되던 1909년 10월 3일 임명남과 결혼하였고, 칠서면 무릉리 274번지에서 이적하였다. 그 후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칠원에서 예수를 믿게 된 그는 1902년 6월 17일 방명원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방명원 조사는 1910년 칠원교회에 부임한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라고 할 수 있다. 엄주신은 1913년 3월 5일에는 평북 선천 주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남행리(Henry W. Lampe)로부터 세례 받고, 이듬해 칠원교회 서리집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앙인이자 애국자로서의 길을 갔다. 그 첫 사례가 1919년 만세운동에의 가담이었다. 칠원에서의 경우 만세운동은 손종일과 엄주신의 지도로 박경천(朴敬天), 윤사문(尹士文) 등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이들은 밀회를 거듭한 끝에 3월 23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모의했다. 이날이 칠원장날이었기에 효과적인 시위일로 본 것이다. 이날 오후 4시경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 일은 3월 19일의 함안읍 의거와 3월 20일의 군북에서의 만세 시위에 이은 이 지방의 중요한 만세운동이었다. 손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시위 군중은 칠원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마산 경찰서의 지원을 얻은 왜경은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고 군중을 선동하던 황영환, 신영경, 신영수 등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착검한 총칼로 군중을 위협하였다. 4월 3일 칠원 장날에는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때는 1차 의거 때 보다 3백여 명이 더 많은 1천 3백여 명이 회집했다. 이런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엄주신은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느냐’ 며 항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병원(고등법원) 형사 1부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노구찌(野口)가 간여한 심리에서 “피고 엄주신은 조선 독립의 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원심 공동피고 손종일이 발의한 모의에 동참하여 원심 공동피고 박경천, 윤형규 등과 손잡고 구한국 대형 태극기를 들고 소형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여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전기 손종일 등과 7˜8명이 칠원 장날 군중 안에 들어가 미리 계획된 순서에 따라 피고 엄주신 장로로 하여금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손종일 등과 같이 대형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하면서 읍내를 누볐다. 그러므로 원판결은 지당한 것이므로 항소 이유는 없다. 따라서 형사 소송법 제261조 제1항에 준하여 항소를 기각한다. 대구 복심법원 형 제558호의 판결로 형이 확정된 엄주신 장로는 대구 감옥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런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로 엄주신 장로에게는 1992년 4월 13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2001년 7월 27일에는 국가유공자(보훈처장)로 추서되었다. 2002년 10월 31일, 그와 부인 임명남 여사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1015번)에 이장되었다.
엄주신은 애국자이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신앙인이었다.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변함없이 믿음의 길을 갔고, 1922년 이전에 영수가 되었다. 칠원교회 1922년 1월 2일 당회록에 “엄영수 주신”이란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 영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그는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24년의 칠원교회당 건축 때도 그는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그는 칠원교회까지 4km되는 거리를 오가며 교회당 건축을 감독하였고, 재정적인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모든 뒷바라지를 감당했다고 한다.
엄주신 영수는 1931년 1월 25일 칠원교회 장로로 피택되었고, 1933년 1월 26일에는 손종일에 이어 칠원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다. 손종일은 순교자 손양원의 선친이었다. 이런 신앙의 여정 속에서 경남지방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그가 경남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로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이었다. 1935년 이후 신사참배가 문제시되기 시작하였고, 1938년 이후에는 ‘시국인식’이란 이름으로 신사참배에 순응하거나 어떤 이는 면종복배의 길을 갔으나 엄주신 장로는 이 점에 있어서 단호했다. 이미 독립운동으로 일제와 맞섰던 그는 요시찰인물로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엄주신 장로는 신사는 명백한 우상숭배이자 신앙과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우들과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고취하였다.

일제 고문에서 신앙지킨 엄영환 장로
그의 장남 엄영환 장로(1914-1993)가 신사참배 반대로 고문과 투옥을 당했던 것도 신앙의 결단이지만 선친의 영향이 켰다. 당시 엄영환은 칠원교회 청년이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 하여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수난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후에 부산 부전교회 장로로 일생을 부전교회를 위해 헌신했고,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다. 엄주신 장로의 쌍둥이인 2남과 3남인 엄문섭과 엄무섭은 칠원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신사참배와 ‘히노마루’(日の丸), 곧 일장기에 대한 배례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동일한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국기에 대한 배례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민의례이며,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비국민”의 행위이며 국가에 대한 ‘불경’, 혹은 ‘반역’을 의미했다. 엄주신 장로의 가정은 손종일 장로 가정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을 함께 했던 믿음의 동지였다.
엄주신 장로는 일생동안 한의사로 살았다. 20대 청년 때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정진한 결과 1914년 3월 20일에는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그의 일생동안 한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함안지방에서 이름난 한의사가 되었고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술을 펴는 존경받는 의사가 되었다. 당시 함안과 인근 지방에서 이질이란 설사 환자가 급증했을 때 일본인 의사에게 치료 받던 환자들은 거의 다 사망했으나,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환자는 모두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일로 서부 경남에서는 아주 용한 한의사로 소문났고,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이를 통해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경남법통노회의 지도자로서 부당한 교권에 대항하여 총회석상에서 고별선언을 하고 풀려나 고신교회 설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엄주신 장로는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 그리고 아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일생을 사셨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엄주신 장로는 1973년 8월 28일 83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임종시 자녀손들이 모이자 아주 환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활짝 펴고 천사들이 춤을 추며 나를 데리러 온다”고 하면서, “너희들 찬송을 부르라”고 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기쁜 얼굴로 후손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소천 하였다. 후손으로는 아들 영환(永煥), 문섭(文燮), 무섭(武燮)과 6명의 딸이 있으며, 4명의 손자와 4명의 손녀 등 약 150여명의 후손이 목사, 장로, 권사 혹은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대를 이은 신앙, 엄동규 장로
엄주신 장로의 장손이며 엄영환 장로의 장남인 엄동규 장로(1943~ )는 3대 장로로 현재 서울 동산교회 은퇴 장로(예장합동, 1986년 5월 26일 장립)로, 해망 엄주신 기념 사업회 회장, 초월선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김명숙 권사와의 슬하에 2남을 두고 있으며, 장남 엄준용 목사는 미국 칼빈대학 기독교육학을 연구하고 캐나다 ICS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차남 엄상용 중령은 공군에서 전투기조종사로 교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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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독립운동과 순교신앙 지켜온 장로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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