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이영은 최종.jpg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누리면서 살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비싸고 멋진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골라 먹는 미식가 였습니다. 부자니까요.

반면, 나사로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남은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거지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종기 투성이로 고통받는 그를 보는 것만도 불편했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저렇게 무너졌을까...

 

그런데 멋진 부자도 불쌍한 거지 나사로도 언젠가는 다 죽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은 후가 문제입니다. 죽을 때 영적인 존재가 데리러 오면 그때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끌려서 가야 합니다.(16:22)

부자는 음부로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때 음부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16:24)” 음부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입니다.

이 구절에서 멈추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자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인 것 같은 데...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구원의 기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간 부자에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 진다고 설명합니다 (16:25) 그러면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의 내용들로 내가 받은 구원이 증명된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나의 구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받은 구원이 진실이라면 천국을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육체의 일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6:7~8) 내가 받은 구원이 진실이면 더욱더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고전 3:11~15)

성경은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으며 사람이 한번 죽은 후에는 둘 중 한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는 음부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보이니, 불타는 곳에서 고통 받는 자신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모금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았을 때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 먹으며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의 요구는 거절당합니다. 이유는 음부에서 낙원이 보일 수는 있지만 음부와 낙원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깊은 구덩이가 있어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원이 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일까요? 살아 있는 동안만이 기회였는데, 이제는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구나... 부자는 한번 음부로 들어가면 긍휼함을 받을 기회조차도 다시는 없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부자는 자기의 형제 다섯을 사랑했었나 봅니다. 그 가족이 지금 자기처럼 살다가는 음부로 들어 올텐데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을까? 비로소 음부에 직접 가보니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구원인 것이 깨달아졌겠지요.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혹시라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 천국과 지옥을 간증한다면 믿고 회개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거절 당합니다. 성경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는 것, 그 이상의 다음 세상에 대한 말씀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받겠다 안 받겠다의 문제입니다.(16:31)

천국과 지옥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묵상’(눅 16:19~30)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