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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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
(Anabaptist)

중세 종교개혁에는 루터파와 개혁파운동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개혁자들 중에는 취리히의 쯔빙글리를 중심한 개혁파운동이 오랜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기에는 반쪽 개혁운동이라며 보다 강력한 개혁을 주창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들은 더 철저한 성경적 개혁운동을 추구했다. 그들을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부른다.
재세례파 운동에는 그곳 명문 출신으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과 펠릭스 만쯔(Felix Manz)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교회사에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평가되는 그들의 개혁운동은 쯔빙글리가 성상(聖像)이나 미사를 폐지하는 일에 시의회를 앞장 세운데 비하여, 오히려 중대한 교회 문제에 시의회가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 아래 모인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저한 교회개혁을 바랐다.

유아 세례 반대로 재세례 필요성 대두
가장 먼저 부딛친 문제는 유아 세례였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세례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톨릭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온 유아 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세례란 자기 자신의 고백과 판단 아래 신앙의 상징으로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재생의 상징인 세례는 인격의 변화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신앙의 인격적 결단과 유리된 세례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유아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신앙의 인격적 결단으로 신자가 된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를 ‘재세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재세례파 사람들은 루터파나 개혁파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가톨릭을 통해 전해져 온 것들을 배격하고 1세기의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의 루터파나 개혁파 교회는 대체로 주(州)교회이거나 민족 단위의 국(國)교회였다. 이는 역사적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온 제도이다. 가톨릭이나 루터파 그리고 개혁파 교회는 국가와 합치했으며, 하나의 정치적 단위 안에 있는 국민들은 모두 그들의 교회에 종속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한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주장은 오늘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는 정교(政敎)분리 사상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재세례파는 국가나 주(州)정부 또는 시(市)정부에 예속된 루터파나 개혁파와도 긴장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개혁세력 모두에게 적(賊)으로 간주되어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앞날에는 혹독한 수난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단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법에 의해 처벌되었다. 화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개혁교도들의 영역에서는 그들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물에 잠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 이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
취리히 시의회는 1526년 3월 6일, 재세례파 지도자들을 익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그레벨, 만쯔, 블라우로크  등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2주 후에 탈옥에 성공했으나, 도망다니던 그레벨은 그해 8월 페스트에 걸려 죽었고, 만쯔는 그해 12월경 다시 체포되어 1527년 1월 5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산 채로 림마강에 던저져 순교했다. 블라우로크는 티롤 지방에서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 끝에 1529년 9월 6일 클라우젠에서 화형 당했다.
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에서도 매우 강하게 일어났다. 1525년에서 1528년에는 발타자르 휘프마이어(Balthasar Hubmeyer, 1480-1528)에 의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크 등지에서도  널리 퍼졌다. 그것은 뮌쩌의 농민전쟁의 참패와도 관련이 있었다. 농민전쟁에 실패한 사람들이 귀족과 연합한 루터파를 불신하여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1529년 독일 쉬파이어 의회는 반란세력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재세례를 베푼 사람이나 받은 사람은 타당한 재판의 형식없이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황제의 칙령을 인준했다.

호프만의 제자들과 새 예루살렘
재세례파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도시나 마을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어느 하나의 지리적 중심지나 통일된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그들은 엄격한 성경적 윤리적 표준을 지키려 하였으며, 이 표준을 어기려 드는 사람들과는 상종하기를 거부했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타락한 세계의 본질적 표현인 전쟁을 거부하고, 모든 무력의 사용을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심지어 외부의 핍박에 대해서도 무대응을 원칙으로 삼았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부류는 초대교회처럼 재산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의 타락은 사적(私的) 소유와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내것’ ‘네것’을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과 이웃과의 진정한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세례파의 이러한 ‘새 예루살렘’ 공동체 건설은 독일 북부의 뮌스터에서 시도되었다. 1533년 이 도시에서 재세례파가 세력을 잡고 기독교의 공화체제를 선포했다. 이를 ‘뮌스터 왕국’이라고 부른다.

로트만과 뮌스터 시
당시 네덜란드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뮌스터 시는 가톨릭 주교의 통치하에 있었다. 거기에서 1530년부터 가톨릭 사제 출신인 인문주의자 베른하르트 로트만이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설교의 성격이 시 전역에 알려지면서 시민사회에 동요의 기운이 점차 감돌기 시작하였다. 1931년 성 금요일 밤에 그가 소속된 교회로 시민들이 몰려가 제단을 훼파하고, 로트만의 설교를 위해 교회 뜰에 강단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8월에는 그 도시의 교회당은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주의 목사들의 지도아래 들어갔다. 이 해에 시의회는 시민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모든 교회들에 복음주의 목사들을 임명하였으며, 1933년에 주교는 그 도시를 ‘복음주의 도시’로 선포했다.
그리고 이어 로트만은 유아 세례가 옳지 못하다는 확신을 갖고, 1533년 11월 ‘믿는 자의 세례’와 성만찬의 상징설을 주장하는 ‘신앙고백’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의 출간은 곧 재세례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가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방에서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멜키엘 호프만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루터파 출신인 호프만은 1533년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결과 자신이 바로 사도들 당시의 초대교회를 복원하도록 지명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트라스부르그에 ‘새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얀 마티스와 뮌스터 왕국
이렇게 이주한 인물 중에 하알렘 출신 제과공 얀 마티스(John Mattys)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호프만의 추종자로 자신을 ‘약속된 에녹’이라고 지칭하였다. 마티스는 앞으로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하여 성도들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불신자들을 제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트라스부르그를 버리고 그 대신 뮌스터를 새예루살렘으로 택하셨다고 주장했다.
또 ‘라이덴 얀’(John of Leiden)이라고 불리는 25세의 젊은이가 뮌스터에 도착했다. 라이덴 얀은 1534년 2월 유력 인사들과 함께 시가를 돌아다니며 종교적 회개의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이들은 곧이어 시청과 시장 등을 장악하였다. 이에 놀란 루터파 교도들은 곧 도시를 떠났고, 대신 각처에서 몰려온 수천명의 무산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의회는 재세례파 의원들에 의해 장악되고 얀 마티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시의 유력한 존재였던 로트만도 그들 편에 섰다. 마티스는 사도행전 2장의 사례를 들어 재산의 공동소유제 도입부터 시작했다. 그 공동소유의 관리를 위해 7인의 집사들이 임명되고, 이를 반대하는 대장장이 한 사람을 시장에서 즉결 처형하여 본때를 보였다. 그리고 소수정예 기드온의 300용사를 뽑아 경비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1534년 4월 주교의 군대를 물리치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출격했다가 가톨릭군에 의해 모두 죽었다, 이때 마티스도 함께 죽었다.
마티스의 자리는 라이덴 얀이 이어받았다. 그는 즉시 친위대를 조직하고, 계급제를 정비하여 12장로를 세워 신의 계시에 의한 ‘새 예루살렘’ 편제를 발표함으로써 약 1만명의 주민들을 상대로 공포정치에 들어갔다. 라이덴 얀은 장로회 의장으로 지명됨과 동시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주교군이 도시를 포위하자 심각한 기근에 시달린 끝에 1535년 6월 24일 성이 함락되어 성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이후 재세례파는 네덜란드 사제 출신 메노 시몬스가 이끄는 ‘메노나이트’와 ‘아미쉬’ 운동 등으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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