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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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3일 검경수사권 조정안이 국회에서 표결되었다. 훌륭한 법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이 누구며, 그 법을 또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게 된다. 12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잘못 운용된 법에 의해 무고한 한 사람이 종신형을 언도받은 것을 보고 이에 분격해 일어났던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란 글을 공표해 프랑스 전역을 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던 그날이 1월13일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 같다.
1894년 프랑스에서 소위 ‘드레퓌스 사건’이란 게 터졌다. 이 사건은 간략히 표현하자면, 당시 프랑스 군부 내에서 반국가적인 행위, 곧 프랑스 군대의 기밀을 적대관계에 있던 이웃나라에 돈을 받고 팔아넘긴 한 장교(육군 소령)의 간첩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도 군부는 그의 죄과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를 아무 잘못도 없는 하급 장교(포병 대위)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그 포병 대위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그가 이런 누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혈통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유대적인 군중의 무비판적 절규 속에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광기 어린 오도된 여론은 무조건 군부 편만을 들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거나 시시비비를 가려 보려는 노력은 조금치도 기울일 수 없게 만들었다. 때문에 드레퓌스 대위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종신 유배형이란 중형을 언도받고 악명 높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를 도저히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작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13일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의 탄핵문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 군부의 음모 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전역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때 드레퓌스 옹호파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군부를 비방하고 육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양식 있는 문학인들이 좌시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되어 재심청구의 서명들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엔 졸라를 위시하여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쥘 르나르…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연히 재심 반대파의 결속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국수주의자와 군주주의자 및 반유대주의자는 물론 가톨릭교도 등 수구파들(군부·교회·우파들)이 한데 뭉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재심을 반대하는 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사건은 다시 심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898년 6월, 드레퓌스는 마침내 재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쯤엔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교활하고 집요한 음모와 압력 때문에 재심의 결과는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에 온 세계와 자국 국민들이 격분하자 정부는 다시 ‘특별사면’이란 절충식 타협으로 그를 석방하였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그 후로도 재심요구파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1906년 또다시 재판을 받게 됨으로써 결국 완전한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복직의 영예도 얻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한 유대인 장교의 의옥 사건에서 비롯되어 10년간이나 프랑스를 온통 파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정치적 열풍은 마침내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투옥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쳐왔던 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당대의 프랑스 정치가 클레망소가 드레퓌스 사건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가 에밀 졸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할 만큼 강했던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면서 오도된 군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갈기갈기 찢긴 프랑스에서, 행동을 통한 평화적 저항에 첫 신호를 보낸 영광은 졸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에밀 졸라는 여리고 여행 도중에 강도 만난 자를 더러 목격했다. 제사장이 그를 그냥 보고 지나쳤고 레위인도 그대로 지나쳤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라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마리아인 졸라는 그러나 그를 거기 놔둔 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련한 자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뒤, 제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막집 주인과 함께 그를 극진히 돌봐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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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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