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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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가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유감없이 공동체적 결속과 유연과 탄력에 있다. 그래서 지조와 절개를 자랑하는 사군자로서 유감없이 화폭에 그릴 수 있는 나무가 된다. 대나무 숲을 통해 위기를 맞은 한국 교회가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 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산업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산업 사회의 팽창으로 인한 자원고갈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 지배 야욕 등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거기에다 핵무기의 개발과 원자로의 건설 등은 더욱 인류의 운명을 불행을 초래하고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분열과 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세계에 자주민임을 선포하고 민족 평화 통일을 이루어낸 민족으로 나아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나 혼자 선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물론 지켜야 할 지조 윤리적이고 확실한 신앙적 고백 이것이 기초임에 분명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명을 회복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할 때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우리의 양도 데려와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의 양떼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인들은 가정에서 살림을 잘 해야 한다. 알뜰히 살림을 잘하면 집을 사고 재산이 증식되고 온 가족이 편하게 살 수 있다. 남자는 살림을 잘하는 여자를 만나야 가정생활이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살림을 맡은 살림꾼으로 부름 받았다.
국민을 살리는 것이 정치요 나라 살림을 맡은 것이 정부가 아닌가?.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살림 잘하는 정치인이 누구인가 눈여겨보자.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국민을 속이는자요 이는 도적이다. 국민의 세금을 횡령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강도와 목자를 잘 구분 할 수 있어야겠다.
오늘 이 역사에 등장해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자로 군림한 수많은 독재자 들은 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적질 하고 노략질 하는 강도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 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다.
살리려는 사상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사상운동이 있다. 살리려는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요 죽이려는 사상운동은 사탄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려고 때려 거반 죽게 되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 이렇게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그를 돌보지 않는 때 사마리아 인은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고 진료비를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탁 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 지구상에는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에는 사람을 죽이려는 강도가 있고 사람을 살리는 사마리아인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의 장벽을 넘고 유대교와 이방종교의 이데올로기 벽을 넘는 살림운동 즉 살림 운동가의 대표이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맡은 가장 큰 사명은 예수님의 생명살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자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림의 표상이요 모형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을 살려 내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증언 하였고 그들 자신도 부활의 신앙으로 심령이 살아났다. 복음은 살림이 되는 것이요 살림 운동이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민족 뿐 아니라 흩어진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 하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죽음에 살림으로의 말씀이다.
2020년은 이 살림 운동이 볼 화산처럼 타오르기를 소원하고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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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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