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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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45:3).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지난 후, 흉년이 2년째일 때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임하여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들을 애굽에 보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형들인 줄 알았지만, 형들은 요셉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똑바로 볼 수도 없었겠지만, 본다 한들 총리대신 요셉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요셉이 이미 죽었거나, 다른 집의 노예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총리대신의 용모와 치장이 더욱 몰라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형님들에게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42:24). 시므온은 상당히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누이동생 디나를 세겜성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이 강간하자 세겜성의 모든 남자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후 그들이 고통할 때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레위와 함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34).

 

그런 성격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길 때에도 가장 앞장서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형들 모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에는 시므온만 결박하여 옥에 남겨둔 채 다른 형들은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열 명의 형제 가운데 시므온이 옥에 남겨질 확률은 10%밖에 안 됩니다. 조금 감각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특별히 요셉을 괴롭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남겨놓으셨구나.’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곡식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각 자루를 쏟고 보았을 때 그들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집어넣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돈뭉치가 들어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어서 살펴볼 만도 한데 그들은 단지 착오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지고 또 구하러 가야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곡식을 사오라고 하자 그들은 그곳 총리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아우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43:7)라고 대답합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아버지가 그저 살아계시냐?”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그런 말은 그 집안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가 있지 않으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들이 드디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갔을 때 요셉은 장유의 차서대로 그들을 식탁에 앉힙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주는데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볼 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분이 도대체 누구기에 형제들의 장유유서를 알고, 베냐민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질까?’ 하며 요셉을 유추해 볼만도 합니다. 그런데 열 명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둔할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12:35).

 

정귀남 사모님(안병모 목사님의 부인)이 생전에 어떤 사람과의 문제로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못 살겠고, 못 있겠고, 못 듣겠고, 아무데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랬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사모님은 바로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님으로 인정하자 그토록 힘들게 하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고 무슨 말을 하든지 받을 능력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문제가 그렇게 해결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을 발견하는 것은 영적인 지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못 잡혔던 고기가 바닷가에 서 계신 사람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21:6). 그 때 요한은 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시라.”(21:7)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유다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복하여 드디어 나는 요셉이라.”하고 직접 나타내주었지만 그 전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낸 것처럼 주님도 요셉처럼 수시로 우리에게 나타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전혀 주님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일이든 들지 않는 일이든 우리가 주님이시다.” 외칠 수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능히 감당할 힘을 공급 받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의 공급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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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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