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9
2020/07/07 16:2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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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사도가 되라 (고후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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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살면서 받은 상처가 많은 존재라서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슬픔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한도 많아서 세상의 어느 나라 백성들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백성이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한국 동포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축복에 관한 메시지 보다는 위로의 메시지여야 한다. 마음에 상처받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갖다 주며 먹으라고 해도 마음에 한이 맺혀있고, 심령이 상해있으면, 그것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사 40: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라고 말한다. 얼마나 심한 환난과 고난을 당하였으면 힘에 겨워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을까 상상하기가 힘들다. 9절에는“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0절에는“이같이 큰 사망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마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살아난 사람들 같다. 사도 바울과 그의 형제들이 아시아의 어디에서 이처럼 처절한 환난을 당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바울은 항상 고난과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 사람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말씀을 전하느라고 이러한 환난을 당한 것이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매맞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카, 에베소 (행 19:23-41; 고전 15:32) 등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매를 맞고, 심지어 원형극장에서 맹수와 더불어 격투를 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아 법정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은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내 인생에 고난이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고난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만 그 값이 다를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물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고난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답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인생이 다 고난이기에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4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하고 비방을 받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죄를 대속하여 매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바울에게 넘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 지셨던 예수님의 그 거룩한 고난을 바울 자신도 당하고 있으며, 아주 넘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고난당하시고, 바울도 고난당하고, 우리도 고난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첫째는 아담과의 언역적 연대성 때문이요, 둘째는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14에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라고 했다. 이 말은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수님이 아담의 실형이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죄의 벌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고난당하고, 죽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과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원리를 바울은 모형과 실형의 원리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다. 이 연대성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언약적 연대성”이라고 한다. Covenantal Bond 혹은 Covenantal Union이라고 말한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은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죄인의 명패를 우리의 이마에 붙였고, 사형수의 가죽 옷을 우리에게 입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저주하며 살다가 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다. 우리는 이제 죄인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언약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상처 받으며, 억울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과 한 숨은 예수님과 함께한 상처이고 고난이다. 마치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잠간 고난당하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의 상처는 예수님과 함께 한 영광스러운 상처이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한 고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고난도 없고, 상차도 없고, 눈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자녀이면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다.”(롬8:17). 따라서 우리 신자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은 영광의 상처요,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다 자기 죄와 자기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당하고 환난 당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난당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상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이고 상처이기에, 영광의 상처이고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고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죄값을 치르기 위한 고난이 아니다.
우리 신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바울은 “찬송하자,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인애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며 우리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케 하시는 분이시다.”(1:3-4)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애”로 번역하고 있는 “오이크틸모스”                   라는 말을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4절에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이 특히 의미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 그의 자녀들과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위로의 힘”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는 위로 받아야 할 형제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해서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위선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의 힘”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환난 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할 때에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많은 고난 가운데 그를 위로하시고, 더 나아가 그를 위로의 사도로 세워 고린도 성도들이 그를 통해 위로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의 고난과 환난과 위로를 하나님의 복음 빛 가운데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로서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환난당하고 고난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을 살 힘을 준다. 하나님은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이 자녀이고 백성인 우리들의 고난과 환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계시록 21:4에서는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한 자들을 하늘에서 맞으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모든 눈물을 그의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 나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로 이 땅에서 살면서 상처 받고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할 수 있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힘과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의 샘터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인생들이 교회에 오면 위로 받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오면 평안을 얻고, 인생을 살아야 할 희망과 의미를 찾고, 연약한 다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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