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강성률 목사.jpg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13:2).

 

평양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다가, 탈북한지 7년 째 되는 모 권사님의 간증을 탈북인 김성근 목사님의 채널을 통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의 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후 그 어혈로 순교하였고, 부모님은 6.25 때 폭격을 당하여 사망하고, 자신과 어린 동생이 살아남았는데 교회를 없애고 교인들을 죽이거나 멸한 상태여서 자신은 몰래 하나님을 믿어왔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데, 하루는 한 살(?) 아이가 밖에 앉아있고 엄마는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위원이 찾아왔는데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한다는 소리가 이거 하나님이 주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 엄마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입증되는 일이었습니다. 한 살짜리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가슴 졸이고 있는데 아이가 사탕을 쳐다보고 엄마를 쳐다보고 사탕을 쳐다보고 엄마를 쳐다보고 그렇게 반복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다행히 넘어갈 수 있었답니다.

 

기도하다가 들키면 삼대가 멸절 당하는데, 그는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모란봉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모란봉에서 기도하거나 대동강 다리를 왕래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 말을 안 해도 서로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사이 모란봉 골짜기에 들어가 울면서 실컷 기도하고 나왔는데, 누군가 그를 위하여 망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친구가 되어 자신이 기도할 때는 친구가, 친구가 기도할 때는 그가 보초를 서며 서로를 지켜주었습니다.

 

김일성이 죽은 후 얼마 안 있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은 하늘에 있지. 누구보고 하나님이라고 그래?’라고 혼잣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누군가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고자질하였습니다. 친구가 끌려갈 때 여섯 살짜리 딸과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엄마 양 다리에 매달려서 가지 못하게 말렸지만 보위부 사람들은 아이 앞에서 족쇄를 채우더니 생체 실험실로 끌고 가서 죽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비대면 예배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실물이 아닌 가상 영상에 대한 피로감도 있지만, 예수님의 지체들이 눈빛만이라도 서로를 확인하고 교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심한 피로감일 것입니다. 모닥불은 나무들이 모여야 활활 타오릅니다. 성령의 역사 역시 회중 가운데 강하게 임합니다.

 

예배의 전면적인 제제가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비대면으로 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겪으면서 예배가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신앙인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인지, 신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조금이나마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18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천하 만민이 자신들로 인하여 복을 받도록 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심지어 요나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그를 보내어 회개시키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다시스로 피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그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받았던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오는 복마저 끊기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부흥에는 6.25를 기점으로 신실하고 영력 있는 북 출신의 신앙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서 터를 닦고 교회를 개척한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80·90년대 교계를 대표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행동할 때입니다. 북한 인권을 위하여, 북한 지하교회를 위하여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뜨겁게 기도하여 그들이 양심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보좌를 움직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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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갇힌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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