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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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는 서유럽의 카톨릭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8회에 걸쳐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명칭은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명목은 성지 회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유익을 위하여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곧 봉건영주와 하급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걸고 싸운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위하여 모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요,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3:3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말씀은 뜻이 예수님과 일치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 일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지 그렇지 못하는지에 있으며, 많이 모으거나 적거나가 아니라 그 모임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구제하여 자신의 것들을 내어줄지라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실 수 없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통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패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언약궤를 빼앗겼던 소식을 들었던 엘리는 충격으로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엘리 집안에 대하여 선고한 심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3:13-14). 엘리가 하나님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사랑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고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약궤를 모신다고해도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됩니까?

 

8:29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없습니다. 스스로 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냄을 받아, 주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울로 가라고 하시면 서울로 가고, 예수님께서 대전으로 가라고 하시면 대전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먹고 입고 쓸 것을 일절 공급 받습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 여비와 쓸 것을 마련하여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34).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므로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하면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공급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거듭나게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결코 생명을 넣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 뿐 아니라 직장 또한 주님이 보내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가는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다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23:21-22).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어도 달음질한다고 나옵니다. 열심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행합니다. 자신의 양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각을 살핍니다. 성령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싫어하시는지를 살핍니다. 이런 사람은 혹 영적인 지각이 부족해서 잘 못 된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의 느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대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3:17), 변화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와(17:5), 비록 아들이시지만 종과 같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였습니다(42:1).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 고난의 자취는 자기를 낮추는 자, 십자가 지는 자,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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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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