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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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새 사냥군의 올무가 있고, 극한 염병이 있고, 밤에 놀람이 있고, 낮에 흐르는 화살이 있고,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곳이 있습니다. 천 사람이 내 곁에서, 만 사람이 내 우편에서 엎드러지지만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7).

 

그 은밀한 곳이 나의 피난처가 되고, 나의 요새가 되며, 나의 의뢰처가 됩니다(2). 그 은밀한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에는 성전 뜰이 있고, 거룩한 성소가 있고,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지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지성소 안에는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일반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던 곳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23:45).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지극히 거룩한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개방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을 새긴 비석들이 있습니다(9:4).

 

지성소 안에 들어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더불어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으며,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전은 구약의 성전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장소로서의 성전도 있지만 신앙인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바깥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듯이 오늘날 성전인 신자들도 바깥 뜰 부분과 성소 부분 지성소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과 혼과 몸이 있는데(살전5:23), 몸이 바깥 뜰이라면, 혼은 성소, 영은 지성소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거나, 혼 부분인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것 곧 거듭난 착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성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착한 양심을 통하여 주님과 은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9:1, 고전9:1).

 

착한 양심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며, 거기서 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 감정을 따라, 생각을 따라 살아간다면 결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의 양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은 보통 양심입니다. 경우 가르는 양심, 도덕적인 수준의 양심이지만 신앙인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고요하고 안정 된 심령 가운데 감지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 부분인 지성소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일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 없이는 주님의 음성, 주님의 느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한 차례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매일 매시 원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장막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전 대제사장도 못 누렸던 특권을 매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15절에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 간구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화는 하나님의 영화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는 사람의 차원과 다른 영화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7:2~4).

 

영광의 하나님을 본 바울은 그가 과거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3:7~9). 버린다는 것은 관심을 갖거나 집착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믿고 맡겨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버릴 능력이 생깁니다. 명예 영광 허영심을 버릴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 한 분 영화롭게 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27: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시기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밀한 곳은 초막속입니다. 초막을 장막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면서 초막 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고난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검소하고 겸손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부르면 당장 떠나야 할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쌓아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것이 초막 생활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입니다.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코로나보다 무서운 것은 영적인 코로나입니다. 보이는 코로나가 신앙생활을 멀어지게 한다면 우린 심각한 영적 코로나에 전염 된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방역을 철저히 하되 지존자의 은밀한 곳, 착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며, 기도에 더욱 힘쓰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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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 9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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