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강성률 목사.jpg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어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의 어머니 보는데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우느냐?”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잉태하신 후 열 달 동안 무거운 몸으로 다니시고, 제가 태어날 때 당하셨을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웁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산고를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그 산고의 결과로 아들이 세상에 나왔으니 그 고통은 잊어버린 지 오래구나. 지금 내가 아파하는 것은 그 때의 고통이 아니라 지금 너의 행동 때문이란다.”

 

고난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고, 죄악의 참혹함과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념은 언제까지나 지속 되어야 할 의미 깊은 행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1:6).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가게 됩니다. 열매는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주님이 겪은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흐르는 보혈은 지금도, 미래도 영원토록 흐르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순전히 고통 차원에서만 살펴본다면 주님의 지나간 아픔입니다. 우리는 그 아픔 못지않게 지금 주님이 우리로 인하여 당하시는 아픔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과거의 아픔보다도 오늘날 주님의 아픔을 더욱 체감하고, 주님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은 아닌지 살펴서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번 고난주간 말씀은 지금 내가 주님을 아파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더러운 말을 할 때입니다(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흔히 더러운 말은 욕이나 성적인 농담 같은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삼가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 특히 훼방하는 말은 자신에 대한 의가 가득한 사람 가운데 나오기 쉽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말이 입으로 쏟아질 때 우리는 자기의 교만함에 놀라고 성령이 근심하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고 한탄하십니다(6:5). 6:5을 근거로 볼 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계획은 항상 악합니다. 그러니까 악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한탄하시는 고통을 안겨드릴 때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노아 시대에 인류가 홍수로 인하여 멸망당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임의대로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주님은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8:26)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큰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연약한 자는 잘 넘어집니다. 물론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키와 나이로는 어른인데 여전히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며, 사탕이나 입에 물고 다닌다면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듯,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어린 아이, 세상에 속한 어린 아이라면 성령이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됩니다.

 

저는 매일 저로 인하여 탄식하시는 성령님을 깨닫습니다. 그만큼 제 자신이 하루에도 수 없이 넘어질 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같은 분도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16:7)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착한 양심을 통하여 밤마다 훈계하시고 때론 탄식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 차려서 성령님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질을 내는 것은 주님을 무력으로 밀치는 행동입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발끈하고 화를 내는 것은 예수님을 개천에 처박는 행동이다.” 처음에 저는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제 자신이 화를 낼 때 영안이 캄캄해지는 것을 보고 그 말씀의 참 뜻을 다소나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할 때입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4~6). 예수님을 현저히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회개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것은 회개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20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람이 현재 주님을 괴롭게 한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 때문에, 우리의 분 냄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배반 때문에 주님이 괴로워하시지는 않는지 잘 살펴 회개할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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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금, 나 때문에 주님이 당하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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