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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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로 여기는 제자였습니다(딤후1:2, 2:1). 이런 디모데가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바울은 디모데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바울은 여과 없이 디모데에게 그의 형편,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글을 보는 순간 아이고, 들통 났구나.’ 하며 스승 바울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부끄러움이 교차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디모데의 그런 태도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것이지만 여전히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 디모데야!” 하고 부릅니다. 디모데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해주는 바울,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는 순간은 아프지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음의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오자 베드로는 갑자가 태도를 바꾸더니 이방인 형제들과 식사를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따라 하였고 심지어 바나바조차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2:14, 쉬운말 성경 역). 바울의 사랑 방법은 좋은 점은 칭찬하고 격려하며, 잘 못한 점이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가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20:18~21).

 

이로 인하여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20:26~27). 바울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바탕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파수꾼의 자세,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인을 깨우치면 악인이 돌이키든지 안돌이키든지 에스겔은 책임을 면하지만 만일 에스겔이 깨우치지 아니하면 악인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고, 그의 피 값은 에스겔이 내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3:16~21). 바울이 그런 피 값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파수꾼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고 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24:16).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20:35).

 

한 편으로는 당시 베드로와 디모데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대선배 베드로는 바울의 그러한 지적에 불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에 대하여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라고 하면서 사랑하는 형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베드로 모두 책망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만한 사람이라면 책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9:7~9).

 

이처럼 책망하는 말은 아픈 것이지만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장식입니다(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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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달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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