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비기독교인 조선인의 손으로 쓴 최초의 조선기독교사

백교회통’(百敎會通) 통해 예상되는 종교 간의 갈등 해소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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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괴산 출신 당대의 대학자

간정 이능화(侃亭 李能和)1869119일 고종 6,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나 1945412일 해방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운명을 달리했다. 불교식의 무능거사로 알려져 있고, 그의 호는 간정, 삼현 등으로 쓰였다. 그는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당대의 대학자였다.

이능화의 부친 취당 이원긍(取堂 李源兢, 1849-1919)은 홍문관 교리, 이조 참의, 북청 부사 등을 역임하고, 내무아문 참의, 법무 협판 등을 지냈는데, 1901년 독립협회 지도자로 옥고를 치른 후에 1904년 이상재, 이승만 등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수감 중 미국 선교사 방커(Bunker)의 전도로 개종하여 1904년에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蓮洞敎會)로 나가 기독교에 입문한 뒤에, 1910년 연동교회에서 분립해 종로구 봉익동에 묘동교회(妙洞敎會)를 건립하고 장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능화는 부친의 기독교로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각황사(覺皇寺) 설법 모임에 참여하여 불자(佛者)가 되었다.

 

간정은 1912년에는 불교의 선(). () 양종(兩宗)30본산 주지회의의 결의로 종단 설립학교인 능인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그 후 한일합방 이후에는 종교와 민속학 방면의 자료수집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조선 말기 우리 사회에서 외국어의 사용이 흔치 않던 시절에 한학(漢學)은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와 일본어까지 능통하게 구사하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옛 선비들이 으례히 그랬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20세 되던 1889(고종 21) 상경하여 정동영어학교(貞洞英語學敎)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으며, 1892년에는 한어학교(漢語學敎)에 입학해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어서 26세가 되던 1895년 관립 법어학교(法語學敎)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897(광무 1)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敎) 교관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언어 천재였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까지 능통하게 된 그는 1907년 사립 일어야학사(日語夜學舍)에 입학하여 일본어 공부에도 정진하였고,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신이 졸업한 관립 법어학교 교장이 되었다.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 간사에 피선되어 <불교진흥회 월보>의 편집 일을 감당하였고,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간행한 <조선사> 편수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는 해방 후 친일파로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도교 등 각 종교역사연구

그는 54세가 되던 1923년엔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 <조선기독교사>(朝鮮基督敎史)를 집필하였고, 이어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 <조선여속고>(朝鮮餘俗考), <조선어화사>(朝鮮語花史) 등 개화기 이후 우리 종교와 민속에 관한 중요한 연구 결과물을 남겼다. 아쉬운 점은 이능화의 유품과 저술자료들이 6.25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능화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세쯤 되었을 때 경성에 올라와 서양 사람들로부터 외국어 교육을 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서양 서적과 선교사들을 접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물에는 접속되었으나 세례를 받거나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접하진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학문적 관심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한편, 그의 부친 이원긍은 독립협회 회원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이상재 김정식 윤치호 유성준 등과 함께 YMCA에서 활약하였다. 이능화는 부친 이원긍이 종로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다니면서 감옥 안 서재에 있는 기독교 관계 서적들을 빌려다가 독서하고, 1912년에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그의 첫 저서이자 첫 종교관계 연구서인 <백교회통>(百敎會通)을 저술하였다. 이어서 그는 <조선불교통사>, <조선도교사>, <조선신사지>(朝鮮神事誌), <조선조선교>(朝鮮祖先敎), <조선미신사상사>(朝鮮迷信思想史),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를 집필하였다.

 

그는 만년에 "나는 불교 신자이지만 아버지가 믿은 기독교의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그를 추모하고자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를 통하여 조선 전통사회가 낙후된 것은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피력하면서, 당시 조선사회의 낙후성을 기독교와 결부시켜 밝혀보려고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이능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 영인본 서문).

 

이능화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파를 개개의 국가와 연결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천주교는 프랑스와, 개신교는 미국과, 성공회는 영국과, 정교회는 러시아와 관련시켜 살피고 있다. 그 가운데 이능화는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친 정도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의 기독교에 관하여는 수용 시기만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그 내용의 대부분을 프랑스의 천주교와 미국의 개신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먼저 천주교회사에 대해 중요 내용만 약술해 보면 (1) 천주교의 수용과정을 다루고, (2) 이어 천주교의 전파과정과 박해의 전말을 상세히 분석한 다음, (3) 개항(開港)과 함께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개신교가 한국인 개화에 가장 큰 역할

이능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 원인을 당쟁과 세도정치 등 당시의 정치현실과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조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당쟁과 관련하여 파악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표면적으로는 사교(詐敎) 축출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능화가 미국의 종교로 생각한 개신교는 그 종파가 역시 다양함을 지적하고,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장로교파와 감리교파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능화는 먼저 개신교 수용 과정을 개항 전 미국 상선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다 희생된 영국인 토마스 목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가 정식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이 개항한 이후로 1885(45) 미국 장로교 파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파의 아펜젤러 목사가 입국함으로써 였다고 적고 있다.

 

이능화가 개신교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선교방법이었다.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고 있다. 개신교는 그 교리를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전파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고, 또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과 병행하여 학교와 병원을 포교기관으로 세우고 사회사업을 벌인 것을 주목하고 있다. 무엇보다 개신교의 전도활동이 당시의 한국 사람들을 개화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능화의 기독교사 기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의의로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교리와 역사를 연구하고 썼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사관에 있어서 객관성을 유지했다고 보여진다. 둘째로는 기독교 교리 연구를 통하여 각 종교 간의 회통론(會通論)을 주장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능화의 한국 기독교 연구에서 가장 큰 의의는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기독교사를 저술하였다는 데 있다. 또 한 가지는 한국기독교 연구를 통하여 조선의 양반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점에도 연구자로서 특이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당시 조선사회가 낙후되었고, 왜 일찌기 개화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사상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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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간정 이능화(1869-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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