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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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얼마 전 심방을 마치고 예배당으로 가는 골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세대 주택 담을 지나려고 하는데 응달진 구석에 한 분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일어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자전거에 그분의 다리가 엉켜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넘어졌던 곳 맞은편은 승용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지만 가파른 골목이었습니다.

 

심방을 함께 하셨던 분들은 구급차를 부르고, 저는 자전거에 엉켜있는 부분을 우선 풀어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자전거 브레이크가 갑자기 고장 난 바람에 내리막에서 전속으로 달려와 그대로 담벼락과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일찍 우리 눈에 띄어서 과다출혈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운행 중인 차들에 있어서, 브레이크 고장만큼 사고 위험이 큰 것도 드물 것입니다. 제어되지 않는 자전거, 제어되지 않는 오토바이, 제어되지 않는 승용차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은 고칠 수 있지만 만일 고칠 수 없는 차가 있다면 그 차는 존재 자체가 화근이 되는 것들입니다.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차의 브레이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브레이크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자신의 마음을 잘 제어 하는 사람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쫓아내고 성을 차지한 용사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자기 마음을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성령 충만할 때는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무서워 벌벌 떠는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였습니다(삼상17:49-51).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가 왕이 된 후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요압에게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삼하11:1-27). 그 결과 다윗의 가정은 물론 이스라엘 전체에 어둠이 덮쳐 자신은 한때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치욕을 겪었고, 총 네 명의 자녀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때는 싸움에서 그를 이길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하여 정욕이라는 행인(삼하12:4)을 제어하지 못하였을 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귀를 다스리고 우리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책망하시며, 위로해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마귀를 제어해주시는 브레이크 역할까지 해주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오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번번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유는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합니다(벧전5:8-9).

 

김현봉 목사님은 자주 방심할 때가 죄짓는 때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방심 후에 죄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는 순간 죄짓는다는 뜻으로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방심의 반대는 근신인데 솔로몬은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하면서 근신이 지혜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방심하면 일이 생길 때 주님을 부르짖을 생각도 못 하고 사건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 유혹이 역사할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과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부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요하다는 뜻은 넉넉히 이길 힘을 받는다는 뜻입니다(10:12). 아무리 강력한 마귀 세력이 있다 해도 우리 주님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근신하여,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부르짖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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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 몸의 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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