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말의 위력

이선규목사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말을 계속하며 그 말은 인간 생활의 절대적인 도구인 동시에 자기의 의사 표현을 위한 최상의 수단이 된다.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모든 대상에의 주장을 음성 언어인 말로써 표현하게 된다.
전인적인 인격에서 진실된 말이 우러나오고 투철한 신념과 깊은 사상 속에서 바른말이 나오며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서만이 책임 있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말만 많은 사람, 말로 속이는 사람, 말로 남을 죽이는 사람 말만 잘하는 사람들이 난무 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나꼼수로 각인되는 후보의 오래전에 한말이 세간에 신속히 전달되면서 결과는 선거판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하니 말의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말 가운덴 교양의 껍질로 그 막 돼먹음을 감춘 채 사람의 마음을 후벼대는 진짜배기 악 성 막말들이 있다.
사람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할까? 사람 나름이고 나라와 문화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남자는 평균 2만, 여자는 3만 마디의 말을 하며 산다고 한다. 짐승과 식물 등 생명체의 세계에도 그들대로의 언어가 존재 한다고는 하나 섬세함에서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말은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특권이자 축복이다.
그러므로 말에 대한 책임도 중함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탈무드에도 입 조심에 대한 경구가 많다.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은 집과 같다’ 둘의 공통점은 듣는 사람에게 건강한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마음의 여유 까지 갖게 하는 청량제라는 것이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해서 좋을 때와 해서는 안될 때를 잘 가려야 한다는 점이다. 또 지나치면 말을 그르치거나 자칫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영등포의 모 교회 목사가 제과 공장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 네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공장에 들어 올 때에 노동법이니 근로 기준법이니 하는 것은 아예 수위실에 맡겨두고 들어오시오’ 라고 강조한 후 “그리고 사장님을 위하여 기도 하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일만 하시오”라고 했다. 이에 직공들은 당연히 분개했다. 물론 사장을 위하고 회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설교라고 하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 같은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차라리 아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말 오늘의 기독교가 “잘 된다” “복 받는다.”는 아첨의 메시지만을 전해야 한다면 그런 설 교 속의 그리스도는 성서에 나타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사랑의 님이시어 자기는 입으로 말하면서 타인에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 하나이다. 이러한 강요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참으로 어리석은 고집이니이다. 하오나 님의 말씀 속에는 소리도 없으시고 판단도 없으시며 딱딱 한 법이나 어려운 명령도 담겨 있지 않나이다. 진정 님의 말씀 속에는 능력의 무게보다 역할의 가치가 외형의 평가보다 존재의 절대성이 담겨져 있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가슴처럼 늘 편한 하기만 하나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비난과 굴욕 외로움과 고통을 가슴으로 풀어 오셨기에 님의 생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중심이 되었나이다. 이제 님의 그 수고의 생을 베게삼아 가난한 이들의 고단한 육신과 지친 영혼을 잠깨 울까 하나이다. 불평하는 이에게는 감사의 언어를 슬퍼하는 이에게는 위로의 언어를 근심 하는 자에게는 평화의 말을 잡담으로 가득한 자에게는 진실한 말을 선 한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칭찬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나의 말을 듣는 이의 마음에 새겨져서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또한 그들의 말은 나의 삶도 풍성해 지리라 믿습니다. 나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나의 인생을 만듭니다. 꼼수는 나 꼼 수뿐이 아닙니다. 나도 때로는 나 꼼수가 되려는 유혹에 벗어나게 하소서 이것은 종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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