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또 한 번의 사순절을 보내며!


아픔을 피하지 마라 쉬운 길만을 택하여 인생을 살려고 하는 이는 익히지 않은 쌀을 먹는 이와 같다. 이런 사람은 밥을 하지 않는 수고를 덜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밥맛을 알 수는 없듯이 쉽게만 인생을 살고자 아픔을 외면하는 이는 인생의 맛을 모른다.
인생의 맛은 그가 흘린 땀에서 평가 되는 것이요 그가 짊어졌던 십자가에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은 과일 일수록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많고 꺾이는 수난과 아픔을 겪는 법. 마찬 가지로 성숙한 인간 일수록 남 에게 주어야 할 것이 많아 힘겹지만 그 고통이 바로 인간의 귀중한 가치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순절을 은총이라 말하는 이유는 땀의 결과를 아는 지혜를,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슬기를 깨우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장장이의 이야기이다. 신앙심이 강하고 희생정신이 컸던 그 대장이 어느 날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자 어느 날 , 비 신자인 친구가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자네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네“ 왜 자네처럼 착한 사람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는가?”
대장장이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쇠붙이로 어떤 쟁기를 만들기 위해 우선 시뻘건 불속에 쇠를 달굽니다. 그 다음 불에 달군 쇳덩이를 모루위에 놓고 망치로 때려 봅니다. 만일 그것이 잘 달구어 졌고 쟁기를 만들려하면 나는 곧 그것을 이용하지만 어떤 쇠붙이는 영영 달굼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쇠붙이를 파쇠 더미에 내다 버렸다가 고물 장수에게 팝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단단한 쟁기, 쓸모 있는 쟁기, 쓸모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달구는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은 나에게 고통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귀중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지극히 자신을 단련한 자 외에는 미술관에 가서 관람을 하지 말라” 하였으며 시인 괴테는 “어두운 밤에 눈물로 보리떡 한 조각을 먹어본 자 외에는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른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이 산에서 변화되신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놀랐다. 너무나 황홀했고 거룩했기 때문이다. 베도로가 황홀경에 빠져 초막 셋을 짓자고 자기도 모를 정도로 거룩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눈부신 모습은 자신이 받아야 할 아픔과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임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다. 위대한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아픔과 고통 속에서의 인내와 사랑 뿐 임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사순절 기간 동안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육식을 금하고 금식과 절제 하면서 보내자고 교우들에게 선포하고 자신이 실행해 보려고 노력 하지만 노력 하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러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남이야 죽던지, 살던지 상관 안하고 살던 사람은 남을 위해 무엇인가 좀 더 해보고, 남에게 화만 내고 친절하지 못 했던 사람은 좀 더 친절하게 남을 대해 주고 남을 용서하는 일에 인색했던 사람은 좀 더 관용을 베풀어서 내가 먼저 용서해 주고 교통 규칙 안 지키던 사람은 좀 더 규칙을 잘 지키고 줄서기를 싫은 사람은 줄을 잘 서고 집에 늦게 들어가던 사람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좀 더 일찍 들어오고... 어떠한가?
사순절 이라고 단식을 안 하면 죄가 되는가? 할 수 없이 한 끼라도 금식을 하고 얼굴 찡그리고 살 것이 아니고 내가 단식을 해서 얻은 것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는 기쁨을 체험하는 사순절 기간 이었으면 한다.
십자가를 생각 하면서 일부러 괴로움을 당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는 적극적인 생각으로 사순절 계획을 세워 보아야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사람들을 이런 말로 천명 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같혔을 때에 돌아보았느니라.
의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하였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5-40)
생명의 주와 영생의 관계를 맺는 엄청난 일을 일상생활의 사소한 선행의 토막들과 관련지어 놓은 말씀이다.
자신의 선행을 나타내고자 하는 허영심이나, 지나치게 자아를 선전하는 자고심도 없이, 어떤 대상의 필요만이 동기 가된 작은 선행 등이 찰나적 생명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는 뜻 이것이다. 사실 이런 선행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사상이 된다거나 자신이 좋은 일하고 있다는 만족감 같은데서 나온 것은 아니다.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어버린 선행이다. 이것이 상받을 선행이며 그 보상은 놀랍게도 영생을 안겨준 것임을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하셨다.
이 사상을 성경에서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 이 말씀은 중단 없는 선행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 선행을 동시에 권유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선행은 글짜 그대로 대상이 선별되어 행해 져서는 안 된다. 때로는 한마디 부드러운 말, 피곤한 심령에 안온함을 전해주는 미소하나 까지 라도 선행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은총의 사건인 이 사순절에 우리도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닮기 위하여 그 분이 가셨듯이 아픔을 끓어 안고 고통을 짊어진 채, 묵묵히 오늘도 가야만 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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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사순절을 보내며! - 이선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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