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구원의 세월 2


나의 삶에서 겪은 즐거움과 행복이, 어려움과 과오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라면 나이들어 늙어가며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노인의 삶에는 그리고 그가 살아 온 삶의 흔적에는 그들의 세월이 쌓여있다. 나이를 먹으면 세월이 쌓이고 그 쌓인 세월은 지나온 삶에서 회한(悔恨)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졌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게는 긴 시간이고 허비하는 자에게는 짧기만 한 것이 시간이다. 시간에 따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때문에 시간의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간의 질이다. 게으름을 피우다 중요한 순간에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기보다 매일 주어지는 시간에 성실하여 누구보다 세월을 자기만이 갖는 때로(기회) 소유로 삼는 것이 좋다.(엡5:16)고 한다.
우리는 항상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사는가? 성서에서 ‘세월(헬:기회를 사라)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을 알게 한다. 시간의 최초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우주의 시간적 시작이 시간 안에서인지 혹은 시간과 함께인지의 여부에 대한 관심은 불문하고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인간이 모든 피조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지위를 지니고 있고 그 피조물들의 존재 이유는 삶의 목적에 따라 시간에 '때'를 따라 봉사하기 위함이요 인간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왔으나 오늘의 지구가 생태기에 위기를 초래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에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왜곡에 연유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1초는 영원, 영구, 무한대의 시간이다. 인간의 10억년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다. 시간은 언어나 시제에 의한 사실들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묶일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특징은 시간의 창조에 기인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하나님 경험은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이 시간성과의 질적 차이에서 경험이다.
인 간은 그 시간성에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임을 경험한다. 영원은 모든 시간성의 존재론적 기반이며, 시간성의 온전한 성취요 충만이기도 한 것으로 변화된다. 그리하여 다시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강조되고, 인간의 시간성은 다시 긍정된다. 시간에서 삶을 보면 '시간'이 간다는 것으로 '세월'을 알게 한다. 나만 가는 것이 아니고 너도 가고 모두가 다 간다는 것이다. 시간을 만든 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물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그 분이 계신 삶의 본향을 가기 위해 구원의 길을 가는 삶의 여정에서 세월을 사는 것이다. "가는 세월은 까닭이 있다"는 이 주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구원의 세월"을 알게 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에서 이 사이(間)를 가리키는 間을 가지고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으로 천지인(天地人)관계 맺어짐을 알게 하며 피차간(彼此間)에 서로의 사이가 "가는 세월 오는 때"를 알아 좋은 관계(間 사이)를 알게 한다. "가는 세월은 까닭이 있다"는 이 말은 "오는 때"를 알게 한다. 예수의 말씀과 삶이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서 신앙 고백되어지고, 신학적으로 해석되어 졌을 때에 예수의 말씀과 삶은 과거의 시간 속에 흘러가 버리거나 무덤에 갇혀 버리지 아니하고,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다르고 시대가 달랐어도 예수의 말씀과 삶은 언제나 신앙인들의 공동체와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단순한 '히스토리에'에 머무른다. 우연히 발생된 사건들에 의해서 흘러가 버린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묻혀 버린다. 역사는 '게쉬크테'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필연에 의해서 발생된 것들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되어진 것들이다.하나님의 계획과 경륜 아래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역사나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을 단순한 '히스토리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흘러가 버리는 시간 속에 묻히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 담긴 깊은 뜻을 풀어내야 한다. 풍성한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단순한 '히스토리에(Historie'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밝히 드러나는 '게쉬크테(Geschichte풀이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뛰어들어 "바로 지금"의 순간순간 자기구원의 시간으로 만들어내야 함을 말하며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는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니라'는 "구원의 세월"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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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세월 2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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