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용서하는 자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천국행 열차를 타고 믿음으로 간다고 하지만 실로 생각해 보면 지옥행 열차를 타고 회개하지 않고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회개하지 않는 용서란 무엇인가?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는데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를 말씀하셨는데 무한의 용서를 말한다. 이 용서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용서하는 신앙이지 용서받는 신앙이 아니다. 나는 귀한 존재이지만 자기를 부인하는 죄 많은 존재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義)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흔히 용서란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으로만 안다. 그러나 용서는 남이 나를 용서하도록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용서는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항상 용서의 자리는 내가 남의 잘못이나 행위를 이해하는 것으로 알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고 그 배신에 몸부림치는 고뇌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사실로 느끼며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 삶의 자리를 남에게 내어 주고 남의 간섭에서 종노릇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찾아내는 근본적인 본질이다. 그런데 ‘나’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본 모습을 잊고 있기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는 전제를 알게 한다. 인간은 “용서 받는 자”의 입장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어 “용서하는 자”라는 자기 부정의 입장을 알게 한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은 의인 다섯만이라도, 그리고 단 한명이라도 찾으면 용서해 주시라고 했지만 의인은 없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리라.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하늘나라를 이룬다. 그 예로써 용서하는 자는 잠자리가 편하지만 보복하는 자는 잠자리도 불편?하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이 약점을 보이거나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교만해지고 깔보는 것으로 습관들여져 있다.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이나 모자람은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단점을 흉보고 약점만을 찾아 공격한다.
그리하여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하라. 많이 용서하는 자는 많이 용서받는다”고 했다.이는 화해의 길을 알게 한다. 사람들의 세상살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상처를 주기도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대개 자신이 타인들에게 준 상처는 기억하지 못해도 남들이 나에게 입힌 상처는 오래 간다. 상처의 깊이가 클 경우에는 원한이나, 미움, 증오, 복수심 등과 같은 이름으로 상흔이 남아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기도 한다. 사전적 의미로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을 벌하거나 꾸짖지 않고 덮어주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용서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이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를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해, 혹은 모두를 위해 용서가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분노, 원한, 증오 등과 같은 것들 보다 용서로 이룰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크고 위대하다. 원한을 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연탄 불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같아서 화상을 입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임을 알게 한다. 용서는 잘못을 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라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으로 자신이 먼저 치유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서 용서받아야 할 사람, 용서받아야 할 과오를 놓아줌으로써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용서는 잘못을 잊어버리는 망각이 아니며, 타인에게 베푸는 자선도 아니다. 타인의 잘못으로 부터 내가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의 날갯짓이다.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스스로가 마음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곧 회개이다. 용서하는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말하는 ‘용서가 주는 구원’이다. 그것은 자기부인(自己否認)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인 만큼 또한 공관복음서의 중심사상이며, 예수와 사도들의 말씀선포의 핵심이며 선교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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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자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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