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사역자로서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



 

남해(南海) 섬에서 태어난 이자익
이자익목사(1879~1959)는 1879년 7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부친 이기진(李基珍)과 모친 박정근(朴定根) 사이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였다. 출생한지 두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일찌기 고아가 되어 살길이 막막해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가, 순천을 거쳐 전남 일실군 신평면 하천리에 도착,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후 일자리를 찾아 하동과 남원을 거쳐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가게되어 삼거리에 있는 지주(地主)로서 마방(馬房)을 운영하는 조덕삼 집에서 마부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주인과 함께 교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조덕삼은 당시 금산 일대에서 성행하던 금광사업에도 손을 대서 재산을 모았다. 조덕삼은 장날만 되면 비단을 마차에 싣고 전라도 각 지방을 다니며 장사를 했고, 큰 배나무과수원과 더불어 논농사와 마방을 운영하였음으로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다.

금산 조덕삼 집에서 마부로 일하며 기독교 믿어
이자익은 조덕삼 집에서 마부와  일꾼으로 성심성의를 다해 부지런히 무슨 일에나 충성을 다하였다. 주인 조덕삼 집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는 모르나 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주인의 신임을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같다.
이자익은 청년기에 접어들자 마부직을 그만두고 경북 청도(淸道)에 사는 친구 김종규와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은 서울을 수시로 왕래하며 이곳의 물건을 가져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이자익은 조덕삼의 집에서 그의 아들 조영호가 서당 훈장을 모셔다가 한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 곁을 지나다가 그 소리에 심취되어 창문밖에서 공부하는 소리를 듣고 혼자서 따로 외우다보니, 나도 여기 서 있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꽤 총명했었던가보다. 이자익의 총명함과 학구열에 감동한 조덕삼은 마방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을 아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도록 배려하였다.
그래서 이자익은 언문으로 된 성경 뿐만 아니라 한자로 된 성경이나 국한문 혼용성경까지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일제당시 금산교회가 운영했던 교회부속 유광학교 교장은 조덕삼이었고, 이자익은 이곳에서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자익은 1905년 세례를 받았고 1910년 3월엔 루이스 테이트(Louis Tate, 崔義德)선교사와 함께 평양에 가서 평양신학교에 입학 하였는데, 학교공부를 한 적이 없는 이자익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한문 작문(作文)이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신학교 입학 내규에는 20세에서 40세인 자 중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자는 한글 외에 한문 일어 영어 작문 가능하거나 3년동안 교회 직분을 가졌던 자에게는 특례입학을 허용하였다. 이자익은 한문으로 작문이 가능하였고 영수와 장로로 3년 이상 교회를 섬긴 자격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금산교회가 설립 된 것은 1906년 5월,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이 세례를 받고 금산교회를 세웠다. 당시 금산교회는 전주 선교부에 있던 테이트 선교사가 와서 예배를 인도하였고, 매년 실시되는 교회의 사경회를 통하여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이 쑥쑥 자라갔고 드디어 조덕삼과 이자익은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함께 금산교회 초대 영수가 되었다.
교회는 점점 성장하여 200여명이 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교회를 이끌어갈 장로(長老) 선출 문제가 대두되어 년말 공동의회에서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다. 당시 테이트 선교사가 못올 때는 조덕삼 영수와 이자익 영수가 번갈아 가며 강단을 지켰다.

주인 조덕삼 영수보다 먼저 장로 돼
1908년 연말 장로선출 투표를 하였는데 이게 왠 일인가 금산교회 기둥이요 지주요 선교사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토박이 조덕삼 영수가 떨어지고 이자익 영수의 표가 더 나왔으니 말이다.
한참동안 온 교인들의 숨소리 마져 정지된 듯한 분위기로 서로 어안이 벙벙해 얼굴표정만 살피고 있는데 조덕삼 영수가 일어서더니 “우리교회 초대장로 될 사람으로 주님께서 이자익 영수를 패택장로로 뽑아주셨으니 우리 모두 받수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하면서 먼저 두 손으로 큰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여 금산교회 초대장로로 이자익 영수가 선출되었고, 이자익을 마부로 부렸던 조덕삼 영수의 크고도 넓은 오지랍이 넓은 인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10년에 조덕삼도 이자익영수에 이어 금산교회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의 신앙과 사람됨을 일찌기 간파하고 교회의 후원과 선교부의 도움을 얻어 평양신학교에 이자익을 추천, 장차 교역자가 될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금산교회 조덕삼장로라는 거인장로의 신앙과 혜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덕삼장로의 믿음과 지도자로서의 크기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이자익장로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다시 그를 금산교회 교역자로 청빙하여 그가 외치는 설교를 듣기까지 하는 배려를 늦추지 않았다. 이와같은 아름다운 신앙사건은 한국기독교100년사 속에서 농익은 신앙미담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배워야 할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국내 성지 순례객들이 매주 수백명씩 전북 금산교회를 방문한다고 한다. 그들은 순례객들이 그곳에서 조덕삼장로와 이자익목사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접하고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조덕삼의 신앙적 인품이 목사 이자익 낳아
장로투표는 장로가 될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의 믿음과 삶의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선택하는 것이지, 지주나 부호 등의 재력을 보고 뽑는 것은 아니다. 두정리교회(금산교회 전신)의 신도들은 당연히 이자익의 믿음의 분량을 보고 장로로 뽑은 것이다. 한편, 조덕삼은 자신이 아직 장로가 될 믿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된 것을 흔쾌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조덕삼은 이자익의 외모를 취하지 않고,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의 믿음을 보고 그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했고, 그를 평양신학교로 보내고 교육받게 한 후 본교회 전도자로 초빙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러한 진실되고 아름다운 교회에서 탄생한 이자익목사에게 교단이 어려울 때마다 총회의 리더쉽을 3번이나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곰곰히 살펴보면 조덕삼이란 진실되고 겸손한 장로가 없었다면 이자익이란 유명한 지도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같은 영수이었고 장로이었던 것이지만  조덕삼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머슴이었고 마부출신이었던 이자익목사의 설교를 주님의 대언자의 말씀으로 생각했고 그의 설교를 항상 기쁨으로 들었고 그를 존경하였다고 했으니 어쩌면 총회장을 3번 한 이자익목사 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조덕삼장로였는지 모를 일이다.

예장 역사에서 유일한 3선 총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2015년 9월로 회기가 100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총회장의 숫자도 당연히 100명이 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98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유와 원인이 제13회(1924) 제33회(1947) 제34회(1948) 이렇게 세번의 총회장을 이자익목사 한 사람이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100회 역사상 초유의 일이요, 유일 독특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처럼 인맥 지연 돈선거를 치루었다면 머슴이요 마부출신이 어떻게 한 교단의 수장이 될 수 있겠는가?
오늘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지도자들과 앞으로 교정(敎政)에 뜻을 두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들이 있다면 한국장로교회총회100년사상 유일무이한 지도자 이자익목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자익목사에 대한 서양 선교사의 기록인 니스벳 선교사(Anable Major Nisbet)가 쓴 <호남선교 초기역사 1892-1919>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사역자로서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자신 및 가족과 관계 있는 사항에 있어서는 전혀 사라사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사람됨을 평가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3. 제13, 33, 34회 총회장 이자익(李自益)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