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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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신비주의 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1624-1677)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다가선 신비사상가였다.
<명상시집>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그의 대표작의 원래 이름 <Cherubinischer Wandersmann,(케르빔적 방랑자)>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천사를 닮고자 스스로 정신적 방랑자가 된다. 명상으로 얻은 시상들을 두 줄 혹은 넉 줄의 간결한 형태로 적어가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침묵으로 섬기는 것이 옳다.” 
“‘나와 그분의 관계’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 만약에 우리가 이 양자관계를 잃어버린다면 /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고, 하늘은 무너진다.”하고 노래한 시에는 “모든 것은 ‘나와 그대(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격적인 “나”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그대”하고 부르는 관계로서 집약된다고 본 것이다. “나와 그대”의 관계가 무너지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한 기능으로서의 평면적인 물(物)로 변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시인의 생각은 <나와 그대(Ich und Du)>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와도 맥을 통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또 시인은 외식적인 기도는 물론, 외면적인 기도도 부정했다. 기도 대신 침묵하고 명상했다. 명상만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말은 타자의 입보다는 그대 안에서 훨씬 크게 울린다. / 침묵하고 그 말에 귀 기울여라.” 명상을 내세우는 시인은 결코 인간의 육체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의 육체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인 것을. /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이 육체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질레지우스는 소리를 내어 떠들썩하게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꼴을 보아 넘기지 못했다. 신성에 반하는 짓이라 여긴 것이다. 질레지우스를 모르지 않을 막스 피카트(Max Pickard)도 그의 명저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에서 말했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를 만난다. 침묵에서 태어나는 언어는 아직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는 최초의 말과 같이 근원적이다. 이 언어는 하나님의 신비를 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침묵으로 하나님의 신비로 다가설 때, 인간 스스로도 침묵의 층을 넓혀가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읊었다. “하나님을 향해 소리쳐서는 안 된다. / 물(水)의 근원은 그대 속에 있는 것을. / 그대가 입구를 틀어막지 않는다면 물은 끝없이 흘러나온다.”
“나는 유일한 것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택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천 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해도, 그대 속에서가 아니면, 영원히 무의미하다.”
“골고다 십자가는 그대 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대를 악으로부터 끌어낼 수 없다.”
“내가 자신의 빛을 직시해야 한다면 / 면전에 그 어떠한 벽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에게 있어, 성서, 기도서, 찬송가 혹은 교회의 예전은 한갓 매개물에 불과했다. 이들을 치워버리고,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 명상이었다. “자신의 빛”을 본다는 노릇은 자신의 내면의  빛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대 내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라.” 했다.
“미스틱”이란 본래 그리스어로 “눈을 감는다”는 뜻. 눈은 외부를 보기 위한 것. 외부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보이는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오로지 내면의 길을 걸어 피안의 존재와 접촉해보려는 의도이다. 시인은 그 과정을 “자신 안에 있으면서 자신을 초월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여행”이라 했다.
언어도 비유도 미칠 수 없는 “영혼의 광야”를 방황하는 케루빔적 방황처럼 미지의 나를 찾아 아직 창조되지 않는 신성한 바다에 잠기는 것이 곧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명상이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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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명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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