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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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로 보내는 서신을 마감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이들 중에는 교회의 유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로마 바깥에서 거류할 때에 바울을 만나서 비로소 복음을 접하였거나, 이미 로마에서 추방되기 이전에 복음을 접하였지만 바울을 만남으로 인해서 복음을 명료하게 인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등극하면서 다시금 유대인들을 로마로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에 다시 로마로 입국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로마에 다시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유대인이 아닌 여러 계층으로 이뤄진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많은 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에 유대 크리스천들은 그곳에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어울림에서 약자의 위치에 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대주의자들과 유대크리스천들은 이미 로마시 안에서도 박 터지는 갈등을 야기하였지만, 추방 이후 로마 시 바깥에서도 지독한 충돌을 경험하였던 바이었다. 이들은 로마에 재입국하면서도 복음과 율법의 문제뿐 아니라 새로운 이방인 크리스천 집단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과 사회적 환경에서 명예 문제나 사소하고 미묘하게 차별을 두는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복음의 인지도를 재점검하고, 복음의 명료성을 갖추게 할 가르침의 권위,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삶에 본보기적인 됨됨이를 갖춘 인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 발견된 랍비문서를 보면, 유대 랍비의 서신을 갖고서 멀리 떨어진 유대인 공동체에 보냄을 받는 사신들은, 그 서신을 보낸 랍비와 대등한 질적 권위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사도를 로마 시에 입국한 이들에게서 고르질 아니하고, 오히려 로마 시 바깥에 있는 겐그레아의 뵈뵈집사를 선택하였다.

 바울의 서신을 갖고서 보내어지는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학습된 명료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복음에 적합한 행동과 인격과 영성, 성령의 나타남을 바울과 대등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든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복음의 질에 맞먹는 인격의 품질이 복음을 손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뵈뵈집사가 로마 시에 가져온 바울의 복음은 마침 시기에 적절하게 적용되었다. 오늘날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남자 교역자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TV 연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저들의 인격이나 영성이 복음의 질을 넉넉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안도감마저 드는 것은 마땅한 처사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여성들에게 안수를 하게 된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란 마음이 든다. 과거 여성 지도자를 어느 교단보다 먼저 배출한 곳은 감리교이다. 교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을 멈추고 장려함으로써 여성 지도자 풀을 넉넉하게 갖추게 되었고, 국가가 여성일군을 필요로 할 때에 저들이 선뜻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교회가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 금권의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지만, 원시교회에서도 오늘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화평과 희락임’을 충분히 숙지한 뵈뵈는 분열의 조짐이 멀리서도 인지되던 로마교회를 손수 감싸 안고 효율적으로 치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세상 집단과 다른 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여 한 성령을 마시고, 같은 떡과 잔을 나누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양성을 한 몸으로 세워 가려면, 지도자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높여주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까지는 조직을 성급하게 구성해서는 아니 된다. 단체마다 모임을 가지면 회장이나 총무를 뽑아 조직하는데, 이는 명예나 권력, 이기적인 이익에 고착된 나머지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질 못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유하고, 성령의 각양은사들과, 희생적인 본보기로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가야만 비로소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뵈뵈집사는 공동체마다 가서, 가슴 떨리게 로마서 서신을 낭독하고, 가르치며, 협력을 얻어내어서,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화평과 기쁨의 하나님나라’를 이뤄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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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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