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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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대동군에서 출생

김윤찬목사(1905. 8. 23~1993. 1. 3)는 평안도 대동군 청용면 산사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27대를 거쳐 광주김씨 후손들이 둥지를 틀고 내려오는 마음이었다. 약 100여 세대의 김씨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모두가 친족들로 어우러진 씨족 마을이었다.
이 고요한 산사리에 평양선교 기지의 책임자였던 마포삼열(Rev.Samuel A. Moffete 1916~2014)목사가 나타나 노방전도로 복음을 제일먼저 받아들인 부친 김락환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온 가문이 신자가 되는 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팻 목사가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사람들을 만드셨으며 복을 주시며 우리 인간들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에 김락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세상 모두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만든 분(神)이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믿고 있었던 김락환에게는 충격적이고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만나
마포삼열목사 그가 어찌하여 이 먼 산사리에까지 나타났을까? 평양장로신학교 설립자요 한국선교의 대표적인 인물 미국인 마포삼열목사는 당시 나이 34세 이 땅에 와서 사역하던 중 어찌 김락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곳에서 새문물에 갈망하고 있던 김락환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인 진실이 섭리하였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겠다.
그의 나이 7살이 되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학문을 배우게 되는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사서삼경을 다 마쳤을 때는 소년시절이 다 지나고 18세가 되었다. 서당에서는 어느덧 모범생이 되어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구사상을 익혀 가며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1923년 어느날 윤찬은 더이상 구학문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고향 산사리 장로교회에서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삼성중학교(三聖中學校)에 18세의 청년의 나이로 1학년에 입학하였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일본어 산수 국어 역사 지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그가 어느 정도 신학문에 심취하는 중 4년의 세월이 흘렀고 졸업을 할 때는 23살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22세의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배필은 중화군내 상원 내동교회 영수이신 한두협의 딸 한부흥양을 맞이하였다. 아내는 28세의 나이로 믿음이 굳고 신앙생활에도 열심인 양가집 규수였고, 처가의 생활도 부유한 처지라 부모밑에서 잘 자란 처녀였다. 1927년 3월 12일 중화군 내동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윤찬 슬하에는 3남3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산 순교자 김윤찬목사의 신앙과 삶 김재연 저 2014 킴덤스 p.63-80 참고).
김윤찬목사는 1939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34회로 졸업 그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평양 숭호읍 중부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하였고, 1939년 10월 1일 평양의 청룡교회로 전임, 1945년 7월 평양 연화동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고, 1950년 8월 6·25 전쟁의 와중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그후 1·4 후퇴 당시 월남하여 1951년 6월 부산 평남(平南)교회에서 사역했다.

제49회, 제52회 총회장에 두번 피선
1952년 9월엔 총회신학교 재단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6월 서울의 평안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받아 상경하였다. 1961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페이스신학교(Faith Theo, Seminory)로 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교단지인 기독신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2월 칼빈신학교(현 용인시 칼빈대학교 전신) 교장에 취임,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교육사업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1964년 9월 총회에서 교정(敎政)의 총수자리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 예장의 선봉장으로 교정을 이끌어갔다. 그의 원만한 성격과 강단있는 정치는 총회원과 전국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1967년 총회에서 재선되는 영예로운 총회장이 되었다.
그가 한국교회와 교단 부흥과 발전, 나아가서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신앙진흥에 기여한 역사를 몇가지 정리해 보면, 김윤찬목사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 곧 한국교회에 평양장로회신학교로부터 내려온 장로교 정통의 킬빈주의신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다는 가장 중요한 이념에 매우 충실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유주의 신앙사조가 공존하는 한국교계에 정통개혁주의와 칼빈주의 신앙이념을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성경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신학으로부터 장로교의 정통보수 신앙을 지켜 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자유주의 신신학에 맞서 중심적 역할 감당
1930년대 당시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과학적 역사적 측면에서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김재준은 이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교단신학의 보루였던 신학지남(神學指南) 총회신학교 기관 학술지를 장악하여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중흥을 꾀하였다. 성경 무오성을 부인하는 김재준의 신학은 장로교 정통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였다. 결국 예장 제38회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파면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용단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바로 김윤찬목사였다. 김목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통 장로교신학과 신앙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는 총회신학교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하여 매년 학기초에는 전임강사 이상의 교수에 대하여 매학기 초마다 개혁신학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갱신하는 제도확립에 앞장섰다. 당시 그는 총신 이사장이었고 총회장 지위에 있을 때였다.
한편 1959년 제44회 총회를 기점으로 통합측이 분리되어 나간 후 예장합동 총회는 교회의 영적 부흥과 영적회복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에도 김윤찬목사가 앞장서 갔다. 그는 1964년 총회장에 피선되었을 때, 제1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1964년 2월 22일부터 충현교회에서 모인 뒤 지금까지 교단의 일치와 화합 그리고 발전을 도모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난타개를 위하여 총회임원 중심의 기도회에도 앞장섰다. 그는 1964년 9월, 제49회 총회장 시절 주일학교사업을 통한 100만 신도부흥운동 10개년을 계획실행하였으며, 교단설립 80주년 기념 교육대회 개최, 아울러 총회자립운영을 위해 세례교인의 의무제도를 처음 시행하고, 교단성장을 위한 장기계획으로 1968년에는 10의1조 통일안을 마련 시행하여 총회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초를 닦았다.
무엇보다도 김윤찬목사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갈망하는 합동운동에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통합측과 WCC 신학사상 문제로 분열 이후 고려파와의 합동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려신학교 설립 후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보수적 신학을 지켜 가려는 고려파와 반 WCC 에큐메니칼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총회와의 연합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는 고신측과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합동추진위원을 10명 선정하였는데 그 중에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고신측과의 합동에도 중심
양측의 합동결의 상항을 보면 양측은 5인씩 헌법수정인원회를 선임하여 합동을 위해 헌법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합동측 5인 가운데 김목사가 자리했음은 물론이었다. 그결과 1960년 12월 13일 오후 5시30분 서울 승동교회에서 고신측 총대 131명, 합동측 총대 233명이 참석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그후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분리해 나간 통합측과 재통합을 위한 모임었는데 이때 제시된 세가지 합동원칙을 보면 ①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 NCC를 탈퇴할 것 ②  신학교를 보수적이며 복음적 정통신학을 고수 경영하며 ③ WCC적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선교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통합운동의 시기가 바로 김윤찬목사가 총회장이였던 1964년과 1967년 어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합측과 분열 후 합동측을 추스른 공로자
마지막으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은 신학교 재건을 위하여서도 김윤찬목사가 끼친 공헌이 있다. 총회가 분열된 후 소위 통합(W.C.C. 지지파) 측은 막대한 자금의 보고인 미국 남북장로교회의 힘을 빌려 전국노회와 교회를 향한 물량공세로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선교부와 단절된 합동측은 자금줄이 막히게 되자 김윤찬목사가 국제기독교협의회(I.C.C)회장 칼 메킨타이어에 도움을 요청, 당시 미화로 12만불을 지원받아 용산역 부근에 신학교 교사로 활용하기 위해 건물 1동을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성취한 이가 바로 김윤찬목사였다.
그는 신학교 발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총회가 운영하는 총신대학 진흥과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자신이 또 총회산하 평신도 및 기독교지도자 양성을 위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 선생의 이름을 딴 칼빈대학교의 모체 칼빈신학교를 당국에 허락받아 설립, 교단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좀더 자유로운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칼빈대학교를 설립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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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49회·제52회 총회장 김윤찬(金允燦)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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