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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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믹 신학교 출신
마포삼열(1864.1~1930.10.24, 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혹은 馬三悅)목사는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하노버대학(Hanovercollge)에서 자연계 계통의 공부을 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의 증인으로 소명받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보수주의 계통의 맥코믹(Meomick)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에 선교사로 나갈 베이드(W. M.Baird)와 기포드(D.L.Gifford)를 만나 동기 졸업생으로 세 사람이 모두 조선에 나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므로써 조선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고, 맥코믹 졸업생들의 조선선교의 문을 여는데 선구자적인 역할를 감당해 냈다.
신학교를 졸업한 마팻은 1889년 4월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받고 이듬해인 1890년 1월, 25세의 독신청년으로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사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 도착한 마팻도 한국말을 학습하는 것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전도사역을 감당하였는데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이 지날 즈음 그는 조랑말을 타고 조선땅 서북부지방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그가 평생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선교기지(Missionstation)가 되었다. 후에 그의 선교활동에 큰 성과가 나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그곳에 북쪽전역의 선교기지가 되었다. 이 여행길로 평안북도 의주(義州)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에서 그는 한석진(韓錫晋)을 만나게 되었고, 한석진은 마팻의 조사(Helper)가 되어 마팻의 선교길잡이가 되었다. 후에 한석진은 한국 최초 7인 목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청소년 교육
서울로 돌아온 마팻은 언더우드(Underwood)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이었던 오늘의 ‘경신학교’를 맡아 청소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서북지역에 대한 선교사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1891년 봄, 게일(James Gale)과 함께 다시 북쪽에 있는 평안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멀리 만주(滿洲) 심양까지 가서 한국선교의 기초를 놓은 존 로쓰(Rev. John Ross)선교사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는 함경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는 이 선교여행에서 평양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팻은 드디어 1893년 평양에 선교거점 허락을 받고 그해 4월 평양에 내려와 본격적인 선교를 펼쳤다.
대동문(大同門) 근처 숨막골에 주택을 마련하고 길거리에 나가 노방전도를 하던 중 후에 바다건너 제주도 선교의 주역이된 이기풍 청년이 던진 돌에 맞아 턱에 부상을 입은 일화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역사에 오래오래 회자화 되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가 이때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평양 장대현교회 설립
그는 평양 최초의 교인 최치량과 함께 방 한 칸을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수가 증가해 넓다리골 와가(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가 평양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후에 이 교회는 장대제로 옮겨 가면서 장대현(章臺峴)교회가 되었는데 당시에 평양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중앙교회(中央敎會)로 불리기도 하였다.
장대현교회는 후에 길선주목사가 담임목사가 되어 여러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하면서 평양의 어머니교회로써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다.
마팻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북도는 김관근에게, 평안남도는 한석진에게, 황해도는 길선주에게 맡겨 전도하게 하여 이 일대의 교회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마팻이 세운 교회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은퇴할 무렵에는 서북지방에만 1천 여개의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개척설립의 공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겠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
마팻이 한국선교에 끼친 공로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장차 교회를 이끄러갈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세운 일이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할 목자(牧者)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교부에서 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우면서 선교사들을 리드 해 나갈 정도로 높은 학력이 되지 않도록 하며 일반 대학수준보다는 조금 낮은 위치의 학력을 갖추는 원칙을 세워 선교사 자신들의 리더십(Leadership)을 초과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하에 드디어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종섭과 방기창 두 청년을 자기집 사랑방에서 선교사 그레함 리(Rev. Graham Lee)와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육 수준은 성경(聖經)을 가르치는 성경학교(Bible School)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의 신학교육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듬해  학생수가 6명으로 늘어나자 한국에 나와 선교하던 4장로교회측, 즉 미국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로 구성된 ‘장로교협의회’가 평양에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마팻(Samuel A.Moffett)이 시작한 신학반(神學班)을 정식 신학교(神學校 Seminary)로 인정하여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4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였기에 ‘연합신학교’(Union Semimary)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장로회신학교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양 장로회신학교 혹은 평양신학교라 일반적으로 불리어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양성 위한 숭실전문대학 설립
마팻은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4년까지 이 직에 머물면서 초기 한국신학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초창기 신학교육 제도는 한달 공부하고 3개월 동안은 목회지에서 사역하고 다시 와서 공부하는 방법으로 5년 과정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1907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7인의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름들이 저 유명한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 송린서가 바로 그들이다.
마팻은 한국 독립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교회 조직에 큰 공을 세웠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여파로 조선인 목사가 총회에서 선출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총회장으로(1919. 10. 4)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린 제8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어 어려운 때에 교회를 이끌어갔다.
마팻선교사가 교육선교사업으로 한국교회에 뚜렷한 선교사역의 열매로는 대학을 지향해 세운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大學)의 설립이다. 이 학교는 1894년부터 평양 넓다리교회에서 이영언을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숭실대학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숭실전문학교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의여자전문학교로 발전해 나갔고 이를 일컬어 ‘삼숭’(三崇)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1918년부터 1928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신학교와 더불어 숭실을 통하여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마팻선교사가 남긴 또 하나의 큰 공적을 든다면 이 땅에 보수주의 신학의 정초(定礎)를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보면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신앙은 주로 전천년설(pre-milhnialism)의 영향을 받아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면서 세계선교에 나선 선교사들이 많았다. 이렇다보니 마팻에게 교육받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수주의 신앙 한국교회 성장 발전의 원동력
마팻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초한 기도, 성수주일, 십일조, 엄격한 치리, 근검, 절약으로 이어지는 청교도적인 신앙으로 개척기 조선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한편 보수가 지닌 배타성이 강해 다양한 진보 자유주의 수용이 어려웠고 단순성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약점도 동시에 지니기도 했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보수성에 둔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마팻의 이 보수적인 신학사상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대 개정사립학교법으로 성경교육을 금지할려고 할 때 적극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격동기 한국 근세역사 속에서도 50년간을 조선선교에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마팻은 말년에도 투지있게 활동하였으나 예기치 못한 육신의 질병으로 치료차 귀국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의 돈노비아에서 타계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주선으로 그의 유언대로 그가 섬겼던 교정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다섯 모두가 대를 이어 한국선교에 매진했다. 그중 셋째 아들 마삼락(Samuel Hugh Moffett)은 부친이 세운 장신대학의 교수로 학장으로 수고했고, 넷째 아들 마화열(Howavd Moffett 馬和悅)은 의학박사로 대구 동산의료센터 이사장으로 사역하였다. 마팻선교사의 한국선교 사역은 그가 이 땅을 떠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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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8회 총회장 마포삼열(馬布三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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