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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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산헤드린 교회에서 정죄를 받을 당시, 그 죄 몫이 ‘성전을 부수고 사흘 안에 짓는 자’이다. 마가복음 14:58; 15:29, 마태복음 26:61; 27:40에서 시사 하듯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유대인의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우려 한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처사이었음을 완곡하게 드러내다가, 복음서로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서에서는 작심하고 복음서의 서두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선포하였다. 예수가 나무에 매어달린 이후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된 그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학이 발전되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서 무엇을 이루어 내셨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좀 더 명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역자이든지 평신도이든지 막론하고, 21세기 현대 교회를 섬기는 왕과 같은 제사장들로서 그렇게 오랜 세월 유대인들의 정신사에서 지켜진 예루살렘성전을 그리스도께서 허물려는 이유를 보다 더 확실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무너진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스룹바벨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항상 성전을 재건하려는 시도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성전을 복구하는 데에 전심하였다. 오늘에 와서도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를 하겠지만, 도저히 다시 세울 수 없는 딜레마 상태에 있는 것은, 이미 그 장소에 무슬림의 성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세우려는 시도가 우리 한국 땅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나, 성전이 완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름하여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발생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타 종파로도 넘어가는 상황들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우리 한국에서 보다 먼저 유럽교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례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세우려는 성전은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돌로 세우려는 성전이든지 돌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세우려 하던지, 그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임을 찾아내어서, 예수가 부수려한 성전은 무엇이고, 예수가 다시 세우려는 성전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분별하여서, 함께 비교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성전을 목숨을 내걸고 허물어낸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시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시도하셨고, 마틴 루터와 칼뱅도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성전을 제대로 무너뜨려야 새로 짓는 성전이 탄탄하게 지어질 것이 아닐까? 허지만 루터와 칼뱅 이후, 저들이 무너트린 성전이 도처에 궁전처럼 다시 지어져서 도시마다 번쩍이고 그 세를 위시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다.

 요즈음 세상을 개혁하자고 권력을 부여 받고, 칼을 그 칼집에서 꺼낸 자가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기도 전에, 오히려 그 자신이 그 칼날에 제물이 되는 것을 보았다. 갑옷을 입었다고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다윗이란 자는 허름한 일상 옷차림만으로도 물맷돌로 단숨에 적을 쓰러트렸으니 말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칼뱅이 무너뜨린 교황의 성전을 도처에 다시 세웠다. 예수께서 무너뜨린 성전을 그의 제자라고 스스로 일컫는 자들이 버젓이 다시 세운 것이다.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에 포로가 되고, 성령론이 교회론에 포수가 된 것만이 아니다. 실체로 ‘오직 주님!’이란 표제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의 사제들에게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도 그의 처소가 된 성전에 나타나시질 않으신 것이다. 교회가 성령을 훼방하고 모욕하여 내어 쫓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로마교회 같이 자만에 빠져서 성령을 모욕하는 일을 멈추질 아니한다. 어느 신학자는 이를 빗대어 성령께서 수줍음을 타셔서 오늘의 교회에는 들어오시길 꺼려하신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른 신학과 가이드라인을 제시 했어야 할 신학자 자신들이 골리앗의 위세에 움츠러들어서 나무 밑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긴 사울의 군대같이 전의를 빼앗겨서인지 아무도 나서질 않은지 오래다.

 혹자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루터나 칼뱅이 로마교회를 바르게 청산하지도 못한 과제를 바르게 처리하려고 하거나, 오염된 교회를 청결하게 씻어내자고 할지 모르겠다. 허지만 복음서의 예수의 성전 사건을 부분적으로 보고서 성전청결이라고만 칭하던 신학에서 떠나, 요한복음서에서 옛 성전을 척결하고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전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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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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