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교회가 부교역자의 생계 책임질 수 없다면 이중직도 수용해야

본고는 지난 8일 기윤실이 주최한 ‘2015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심포지엄-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에서 배덕만교수가 발제한 ‘부교역자의 역설적 현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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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평가
(1) 부교역자들은 경제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본 조사에 따르면, 자신들의 사례비에 대한 부교역자들의 인식이 대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분석할 때, 한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즉, 다른 직업과 달리, 부교역자들이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본 조사로 드러났듯이, 부교역자들 중 주택을 제공 받거나 보조를 받는 경우가 많고(77.7%), 정규 사례비 외에 교통비, 통신비, 도서비, 학비 등을 제공 받는 경우도 56.1%나 된다. 따라서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계산할 때, 이런 부분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상황은 어느 정도 호전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현재 부교역자들의 경제상황은 개 교회의 재정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또 교회의 지원과 상관없이, 개별 사역자들 가정의 경제적 특수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사례비가 적지 않음에도, 각 가정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농도 차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선, 이런 내용들이 반영된 통계와 평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부교역자들의 부정적 인식은 최소한 두 가지 감정이 중첩되며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자신들의 학력, 사역의 내용, 근무시간 등을 토대로, 비슷한 수준의 다른 직업들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 열등감이다. 둘째는 담임목사와의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소외감이다. 먼저, 2014년도 ‘도시 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에 대한 통계청 자료를 보면, 4인 가구의 평균소득은 5,224,640원이었다. 이것과 비교할 때, 전임 목사 평균 사례비 204만원, 전임 전도사 148만원, 파트타임 전도사 78만원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이다. 또한, 담임목사 평균 사례비 395만원과 비교할 때도, 그 격차는 매우 크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임금격차는 4대 보험 가입상황을 검토할 때, 더욱 심화된다. 즉, 4대 보험에 가입한 부교역자들의 비율이 매우 낮다. 2014년 5월에 서울시가 발표한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화장품판매점 근로자의 4대 보험 가입률은 64-67%, 커피전문점은 44-46%, 주유소는 74-79%, 편의점은 13-22%, 제과점은 34-39%였다. 반면, 부교역자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은 3.2%에 그침으로써,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번 조사를 통해, 부교역자들에 대한 교회의 대우가 부적절 혹은 불충분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교회가 충분한 재정적 여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담임목사와 비교해서 과도하게 사례비에 차이가 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경우, 그것은 엄연한 레위기 말씀의 위반이다. 가장 정의롭고 공평해야 할 교회가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착취와 억압, 그리고 불의를 자행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심각한 죄다.
(2) 부교역자들의 사역은 과도하고 부당하다.
본 조사를 통해, 부교역자들의 사역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음이 드러났다. 청빙과정에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93.7%)이었고, 일일 평균 사역시간이 과도하게 길었으며(10.8%), 월요일 휴무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47.8%). 이것은 한국교회의 부교역자 채용방식이 아직까지 전근대적이고 주먹구구식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빙과정에서 계약서를 거의 작성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대부분의 경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사례비가 정확히 얼마인지, 사역의 범위와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언제까지 보장되는지에 대해 미리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교회의 가변적 상황과 담임 목사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부교역자의 사역내용과 그에 대한 재정적 보상이 매우 자의적, 유동적, 불규칙적으로 결정 혹은 변동될 수 있다. 이런 상황과 과정에서, 부교역자가 자신의 입장을 표출하거나 납득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일일 평균 사역시간이 일반 직장의 노동시간에 비해 길고 불규칙하다. 수요일, 금요일, 주일처럼 정규예배가 있는 날은 늦게까지 교회에서 일해야 하나, 그런 경우에 야근수당이나 추가적 보상이 이뤄지는 경우는 없다. 또 장례, 혼인, 수련회, 부흥회, 혹은 그 외 특별한 행사들이 있을 경우, 부교역자들은 추가로 근무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추가적 보상은 거의 없다. 심지어 공식적 휴무일로 정해진 월요일마저 휴무가 아예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비록 공식적으로는 정해져 있더라도 장례식을 비롯한 비상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교회의 특수성 때문에, 보장된 월요일 휴식마저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그런 장시간의 노동과 불규칙한 근무시간으로 인해, 부교역자 가정은 가족들끼리 보낼 시간이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거나 불규칙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재정적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다른 교육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안정된 시간도 거의 확보할 수 없다. 결국, 부교역자들은 사명과 헌신이란 명분하에, 적은 임금을 받으며, 과도한 노동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3) 부교역자들은 인격적 모독을 경험하고 있다.
본 조사를 통해, 부교역자들은 개선되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담임목사의 부당한 언행과 권위주의를 지적했으며(22.9%), 이런 갑을관계 속에서 자신들을 종/머슴/노예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간의 기형적 역학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부교역자의 치명적으로 해로운 자기인식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적은 사례비와 과도한 업무 때문에 부교역자들의 자기이해가 대단히 부정적인 상황에서, 담임목사의 부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까지 경험함으로써, 부교역자들의 자기이해가 대단히 부정적.비관적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의 부당한 언행과 권위주의, 부적절한 사례비와 과도한 업무, 그리고 인격모독 등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그 결과, 자신들을 종/머슴/노예, 계약직/비정규직/일용직/임시직, 소모품/부속품, 갑질 당하는 삶, 미생, 아르바이트생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특히 담임목사와의 관계 속에서, 부교역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성직자로서 부교역자들의 자기비하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이런 고용관계와 업무환경은 부교역자들의 정신건강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사역과 교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고, 교회 안에서 부교역자에 대한 일반 성도들의 인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차별 받을 수 없다는 명백한 선언이다.
예수의 이런 가르침을 토대로,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제창했다. 그에 따르면, 성도들 안에 본질적 계급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기능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교회의 권위주의적 문화 속에서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에게 부당한 대우와 인격적 모독을 경험하는 현실은 이런 성경적 규범과 동떨어져있다.
세상을 향해 평등과 존중을 설파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불평등과 모독의 현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경고하셨다(눅17:2). 단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이 타인의 실족으로 이어질 경우, 그것은 구제불능의 치명적인 죄가 된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서 부교역자들이 자신을 종이나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속에 들어가야 할 죄, 정녕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도들에게 사랑과 정의를 설교하는 담임목사가 자신을 돕는 부교역자들을 대상으로 부적절한 언행과 억압을 자행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참담한 신성모독은 없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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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기윤실 심포지엄 ‘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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