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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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그에서 번진 여러 버전들로 해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해적 킷드’의 본 이름은 윌리엄 킷드(William Kidd、1645-1701). 스코틀랜드 태생이었으나 어려서 식민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무역에 종사하면서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얻어,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의 허가를 취득한다. 사략선이란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아 무장한 선박을 운영하여 해적을 비롯한 불법행위를 단속하고 전투도 할 수 있게 한 선박이었다.
자금의 5분의 4를 댄 귀족들이 주주였다면 자신의 배 안티크호를 팔아서 나머지를 충당한 킷드는 현대 경영용어를 따르면 CEO이었던 셈이다. 새로 건조한 ‘어드벤처 게리호’에는 해적 퇴치용 대포 36문을 장착하는가 하면, 70명의 승무원을 태웠다. 그러나 정작 수익은 탐탁하지 못했다. 한몫을 노리던 선원의 불만을 달래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대국 프랑스의 선박과 해적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영국적 이외의 모든 선박을 약탈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덧 킷드는 유사해적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697년 10월 30일, 윌리엄 무어라는 선원과 말다툼 끝에 킷드가 던진 철재 물통이 무어를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킷드는 완전히 해적으로 변신하게 된다.
1698년 1월 30일 “Quedah Merchant”라는 상선을 발견하자 프랑스선박으로 여기고 프랑스국기로 위장하고 접근해서 약탈을 감행한다. 작전이 마무리 지어질 즈음 그 배가 영국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킷드는 선원들에게 배를 다시 돌려주겠으니 없었던 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선원들은 거부하고 킷드 선장을 따라 해적이 된다. 킷드는 두 척의 선단을 거느리는 어엿한 해적선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1698년 4월 1일, 마다카스칼섬에 도착한 선단이 처음으로 마주친 해적선 ‘Mocha Frigate호’는 공교롭게도 한 때 킷드 밑에서 부선장으로 일하던 로버트 칼리포드 (Robert Culliford)가 선장이 되어 있었다. 킷드의 공격명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의 모든 선원이 지난날의 부선장 칼리포드 편에 붙어버리자, 패잔병이 된 킷드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곧 구속 수감되었다가 영국으로 호송된다. 해적행위와 윌리엄 무어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킷드는 1701년 5월 23일,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시신은 테임즈 강둑에 매달려 해적지망생들을 경고하는 본보기가 된다. 물론 킷드에게 출자했던 귀족들은 크게 수치를 당했다.
일반적으로는 킷드가 귀족들에게 출자를 부추겨서 해적해위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뮤지엄 어브 런던 도그런즈”에서 있었던 ‘해적 킷드 선장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킷드가 부유층간의 대립에 휘말렸다는 견해를 드러낸 바 있다. 킷드의 사업은 스폰서의 의사를 따랐을 뿐이었는데, 그로해서 수익에 위협을 느낀 동아시아회사의 배후조종이 킷드를 범죄자로 내몰았다는 것. 그의 무죄를 증명할 만한 증거는 분실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는 재판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처형을 앞둔 킷드 선장이 하원의장에게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다. 보물(약탈품)을 감추어둔 곳을 일러줄 터이니 목숨을 살려달라고 썼다는 것. 그의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인도제도에 감추어진 10만 파운드의 보물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소위 ‘보물섬전설’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보물섬 전설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은1929년, 영국의 변호사 휴벗 파머가 구입한 17세기에 만들어진 오크나무 책상에 ‘선장 윌리엄 킷드, 1699’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발설하면서였다. 가느다란 놋쇠 파이프에서 찾아낸 양피지와 잇따라 발견된 3장의 비슷한 지도에는 모두 킷드 선장의 것과 흡사한 필적이 있었다나. 
파머 변호사의 발견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어왔지만, 선장 킷드가 숨겨두었다는 보물은 그리 큰 금액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킷드가 들렀다는 노바스코시아주의 오크 섬이나, 킷드가 활약거점으로 삼았다는 뉴욕만의 가니너즈 섬에서는 오늘도 보물찾기가 이어지고 있단다. 최근 인디아나 대학 조사팀이 ‘Quedah Merchant호’로 보이는 선박을 발견했다는 소식도 있고...
새삼 보물섬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3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의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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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의 배경, 해적 킷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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