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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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서민 태생 예수가 당시 교회의 권위를 거슬러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율을 깨뜨리고, 회당이나 공고연한 장소에서 장애인을 치유하는 사역을 쉬쉬하질 아니하고 퍼포먼스를 벌리었다. 병아리가 단단한 벽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취득할 수 없다고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하였더라도, 기존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서는 죽음을 내걸고 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더더욱 일반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 관습을 깨는 것도 아닌, 종교의 계율을 무너뜨리는 행위라서 위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예수운동에서 공공연하게 들어나는 것들은 단순히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계층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 같은 지도자들에게 모욕감으로 공분을 사게 하였는데, 예수가 진정한 치료자요 구원자로서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저들의 친구들과도 식탁을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기들의 초대에도 응하였고, 저들은 예수의 환대를 받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가 성전에서 일으킨 퍼포먼스로 인한 두려움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성전을 기반으로 해서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인 특혜를 누리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이해집단들은 예수운동을 잠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예수를 십자가로 처형하는 계략을 내었던 것이다.
예수가 산과 들판에서 사람들에게 던진 가르침은 계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몸을 깨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용과 용서, 치유와 구원을 가져오고,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에서든지 성령의 임재와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30대의 젊은이로서 당시 기존 질서와 권위에 도전장을 내고, 서슴없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능력과 대담한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당시보다 더 부패하고 세월호처럼 기울어진 오늘의 교계를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예수가 보이신 방안들을 차용할 수는 없을까?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의 왕성한 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신앙이나 가치관을 보편화시키질 못하였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고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옛날 다윗 왕조시대의 평화와 부귀를 새로이 꿈꾸었지만 매사 실패를 보고 말았다. 마카베오 형제에게 기대했던 조국의 주권 회복과, 더럽혀진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들이 또다시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 중에 하나는 통치를, 또 하나는 사제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이 되어, 모든 권력과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오염된 역사가 번복되고 누적되자, 다윗의 자손에게서 비롯된 메시아사상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는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삼하 7:12,13,16).
인간의 혈통이나 지연, 학연에 연고를 두고 형성되는 집단들은 명예욕이나 권력욕이나 금욕에서 자유 할 수 없다. 이는 그들 역시 사사로운 이(利)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카베오 형제의 난 이후로 더욱 강력한 메시아사상이 발현되게 되었는데, 다윗왕조를 계승하는 메시아사상이나, 선지자들이 언급한 수난을 당하는 메시아사상이나, 성령으로 새로운 체계를 이룩하는 신학사상을 넘어서서, 다니엘서에서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이 땅에 세우실 메시아는, 위로부터 전권을 가지고 구름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야 하였던 것이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이 보여준 바와 같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제대로 갖춘 통전적인 메시아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예수운동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도 일어났는데, 이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보여준 삶과, 십자가에서 드러낸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가치를 두고 일어선 공동체였다. 갈라디아 공동체나, 여사도 뵈뵈가 로마로 가져와 보급한 바울의 복음서신을 보면, 저들은 오로지 예수 안에서 옛 아담 적인 이기적인 삶을 종료하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세상에 내어주는 삶을 살았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옛 질서와 권위를 깔끔하게 갈아 칠 수 있는,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을 믿고 따르는 수련생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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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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