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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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회의 날이란?
독일 교회의 날의 정식 명칭은 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tag (약칭 DEKT)다. 이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날’ 혹은 ‘독일 개신교 교회의 날’이 된다.
독일 개신교를 대표하는 EKD는 총 20개의 지역교회연합(Landeskriche)을 가진다. 이들은 10개의 unierte Kirch(루터+칼빈주의), 8개의 lutherische Kirche(루터교 중심), 그리고 2개의 reformierte Kirche(장로교 중심)로 이루어진다.
EKD는 2차 대전 이후 나치에 대항했던 고백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연합체이고, 또 EKD에 버금가는 VELKD(Vereinigte Evangelisch-Lutherische Kirche Deutschlands, 독일 복음주의 루터교 연합교회)와 그외 몇몇 연합체들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일교회는 철저하게 지역교회(Landeskirche) 중심이라는 점이다. 이는 과거에 지역 영주의 신앙이 그 지역의 신앙을 결정지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전통 아래 서 있기 때문이다.

1. 1949년 이후 동서 화해와 통일의 열망으로서의 교회의 날
1949년 8월의 첫째 주간, 기독학생의 날(Christlicher Studententag )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남녀 그리스도인들이 하노버에서 모였다. 이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독일 개신교회 (EKD)의 회장 구스타브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독일 개신교회의 날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이듬해인 1950년부터 이 행사는 ‘독일 개신교회의 날’(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tag)이라는 이름으로 61년까지는 매년, 이후로는 2년마다 한 번씩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열리게 되었다.
1950년 8월 에쎈(Essen)에서 열린 독일 교회의 날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서막이 막 오르는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의 개신교인들 약 18만명이 모여 행사를 치르게 된다. 동서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1961년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까지 약 12년간 독일 교회의 날은 동서독의 모든 독일인들이 함께 하는 축제였다. 비록 전후 냉전 체제가 살벌하게 마주하는 동서독 이었지만 그럴 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되길 원했다.
이런 바램 아래 1951년 베를린 교회의 날은 “그래도 우리는 형제들이다”(Wir sind doch Brueder)라는 테마 아래 약 20만명의 동서독의 개신교 평신도들이 화해와 하나됨을 위해 모였다. 또한 53년 함부르크 교회의 날의 주제는 “너희는 신뢰를 버리지 말라”(Werft euer Vertrauen nicht weg)였고, 59년 뮌에서의 교회의 날은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Ihr sollt mein Volk sein)라는 주제를 택했다. 이는 당시 교회의 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동서독의 수 십만 개신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고, 이데올로기적 체제 선전보다 민족적 하나됨과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또한 이는 국경을 넘어 세계 교회와의 일치와 독일인들의 연대의 신호가 되었다.
51년 베를린 교회의 날 폐막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교회의 날은 나뉘어진 독일을 다시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민족 화해의 연장선상 아래서 독일 개신교회의 날은 서독 지역뿐 아니라 동독 지역에서도 개최되었다. “희망 안에서 즐거워하라”(Seid froehlich in Hoffnung )를 테마로 가진 54년 라이프찌히의 교회의 날은 동독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사회 안에서 바른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지를 고민하게 했다. 냉전의 한 복판에서 열린 라이프찌히 교회의 날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당시 메인 집회에 약 65만명의 개신교인들이 모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날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였다. 그들은 지난 날 나치 정권의 죄의 극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나아가 동서독의 통일을 열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 분쟁 안에서 교회의 날을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들 역시 끊이지 않았다. 버스와 전철 그리고 도시 곳곳에 체제를 선전하는 플랭카드가 나부꼈다. 당시 동독 정부도 라이프찌히에서 열리는 교회의 날 행사에 적잖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행사 석달 전 까지도 교회의 날이 열릴 수 있는 지에 대한 허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장애가 돌출되었음에도 라이프찌히 안에는 동서독 개신교인들이 함께 연대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희망 안에서 즐거워하라!”라는 문구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하여 보낸 서신 속에 있는 권면이다. 당시 동독의 개신교회는 정부의 박해 가운데 있었고, 나치 정권의 탄압 아래서 저항의 경험이 있던 동독 개신교회는 다시 한번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배경 아래 65만명의 신앙의 동역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동독교회의 개신교인들에겐 커다란 희망이 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라이프찌히의 교회의 날은 막대한 정치적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후폭풍으로 인해 서유럽 안에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찼다. 이로 인해 서독 역시 재무장과 함께 나토의 결성에 동참해야 한다는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 EKD와 교회의 날 안에서도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과 독일 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교회의 날이 끝난 이후 이러한 열망은 큰 장애를 맞게 된다. 베를린 교회의 날이 끝이 난지 3주 만에 베를린에 커다란 장벽이 세워져 더 이상 동서독의 개신교인들이 소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후 독일 개신 교회의 날은 동서가 나뉘어져 진행되었고, 주로 서독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교회의 날은 그 태생에서부터 사회적 변혁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1960년대 교회의 날은 당시 서독 전역에서 일어난 격렬한 학생운동의 한 가운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반핵운동, 베를린 위기, 쿠바분쟁, 경제적-기술적 혁신, 우주를 선점하려는 경쟁, 제2바티칸 공의회 등 교회의 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2. 혁명 세대와 교회의 날
1967년 하노버 교회의 날의 주제는 “평화가 우리에게 있다”(Der Frieden ist unter uns)였다. 이 중심에는 민감한 정치적 논쟁들이 있었는데, 베트남에서 사용된 미군의 대량 살상용 화학무기의 사용이었다. 또한 이와 함께 나이가리아의 민족전쟁,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6일 전쟁들이 뜨거운 감자였다.
이와 함께 67년 하노버 교회의 날은 당시 서독에서 일어난 학생운동과 폭발적으로 결합되었다. 하노버 교회의 날이 개최되기 3주 전 베를린에서 한 학생이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약 4만명의 개신교인들이 모인 하노버에서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하노버에서 드러난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이듬해 서독의 68학생운동으로 이어져 서독사회에 변혁의 불길을 집히게 된다.
당시 독일 개신교회의 날 안에는 변혁을 바라는 학생운동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써의 정치화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날이 교권화 되고 정치화 될 수 있음을 경고했고, 이 경고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복고적인 주교회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평신도운동인 교회의 날 행사를 자신들의 생각에 맞는 방향으로 길들이길 원했다. 이로써 교회의 날 행사는 조금씩 주교회의 영향권 아래에 종속되어갔다.  

3. 70년대 이후 교회의 날의 변혁
70년대 이후 교회의 날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교회의 날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참석자들도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의 날은 강연식 프로그램을 줄이고, 방문자들과 직접 참여하고 소통하는 형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예배와 예배의 다양화와 정치적 문제에 대한 나눔과 기도 모임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 다시금 교회의 날의 참석자들은 점점 늘어났고, 새로워지게 되었다. 이후 교회의 날은 여성 인권, 환경과 기후에 대한 관심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49년부터 지금까지 독일 개신교회의 날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과 같았다. 신학자들 역시 신학의 관념 속에 갇히지 않았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문제를 놓고 성경과 씨름하고, 평신도들의 손을 잡고 기도의 자리에 무릎 꿇었다. 또한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오늘의 독일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튀빙엔에서 강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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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교회특집 / ‘독일 개신교회의 날’에 대해-2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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